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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
인한수(印漢洙)
생몰연대 : 1881. 1. 20 ~ 1919. 4. 3
출생지역 : 충남 예산
공훈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1992)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장날에 대천(大川)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을 이끌고 대천교(大川橋) 옆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때 일헌병과 일경들이 휘두른 총검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말을 타고 있던 일군 수비대장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내려 내동댕이치자 말에서 떨어진 수비대장이 군도로 목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 註 >
-. 교동인씨 47세 판관공파 삼조할아버지의 자손
-. 교동인씨 대동세보 갑자보 (卷之一) 비문 544·545면
-. 교동인씨 대동세보 갑자보 (卷之三) 자손록 323면
-. 예산군지(예산군지편찬위원회, 1987. 8. 18) 75면
-. 내포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재조명(예산향토사연구회, 1991. 4. 12) 42면
-. 예산의 맥(오성장학회, 1991. 7. 30) 462·486면
▲ 義士印公漢洙顯忠之碑(의사인공한수현충지비), 1972. 4. 2 건립
인수만(印壽萬)
생몰연대 : 1895.05.05 ~ 1945.05.25
본      적 : 경기도 화성 長安 石浦 417
주      소 : 京畿 華城 長安 石浦 417
공훈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1997)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장안면(張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은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爀) 등이 장안면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車炳漢)과 장제덕(張濟悳)·장소진(張韶鎭)·이영쇠(李永釗) 등과 4월 3일 일으키기로 합의하여 계획되었다. 우정면의 책임자는 차희식이, 장안면의 책임자로는 차병혁과 김영세(金永世)가 맡기로 하였다. 이때 인수만은 만세시위의 계획을 접하고 적극 참가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3일, 장안면 석포리에서 시작된 시위운동은 조암(朝岩) 장터에 이르자 시위군중이 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때 차희식이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삼창하였다.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인수만은 시위군중의 앞장에 서서 장안면사무소로 행진하였으며, 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그후 이들은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시위군중들은 우정면으로 향하였다. 이들을 두 갈래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우정면사무소로 향하여 사무소를 파괴하였고, 다른 하나는 화수리(花樹里)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인수만을 비롯한 2,500여 명은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이때 군중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거나 혹은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저항하는 일경을 타살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일경이 죽자, 일제는 보복에 나서, 4월 4일 만세시위 가담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감행하였으며, 4월 6일에는 화수리 마을 전체를 방화하여 초토화시켰다. 그는 만세시위 다음날에 피체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로 징역 3년을 받았으며, 심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348∼377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62∼165面
-.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64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7輯 87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21輯 109·183面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第20輯 47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38∼42面
인이극(印利極)
인이극(印利極) 22세외 12인 원산부 남촌정(南村町) 104번지
위 13명에 대한 보안법 위반·출판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대정 8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이 언도한 유죄 판결에 대하여 피고 13명으로부터 공소를 신립하였으므로 당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水野重功) 입회하에 심리 판결을 다음과 같이 한다.

주문
원 판결 중 피고 13명에 대한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이가순을 징역 2년 6월에 처하고 피고 이순영을 징역 2년에, 피고 차용운·차광은·함하은·김장석·곽명경을 각 징역 1년 6월에 처하고 피고 김기헌·정연수·인이극·이진구를 각 징역 1년에 처한다.
피고 이계술·김진완은 각 무죄, 압수 물건 중 영 제125호의 1인 선언서 1통, 동호의 28인 ≪조선독립선언서≫ 1통은 각 이를 몰수하고, 기여는 소유자에게 반환한다.

이유
피고 이가순·이순영·차용운·차광은·김기헌은 예수교 신자로서 장로파에 속하고, 피고 함하은·정연수·인이극·이진구·김장석·곽명경은 예수교 신자로서 감리파에 속하고 있다. 피고 이가순은 일찍 제국정부(帝國政府)의 조선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대정 8년 2월 21일 경 정춘수(鄭春洙)로부터, 천도교주 손병희·예수교 목사 길선주(吉善宙) 외 31명은 조선 민족의 대표로서 경성에서 간부를 조직하고 기타 동지와 함께 동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서 조선 전도 각지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의 통치를 이탈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을 듣고 이 좋은 기회를 잃지 않기로 하고, 같은 사상을 가진 피고 이순영에 대해서 전시 계획을 말하여 동인도 이에 찬동하고 함께 그 계획을 수행할 운동에 종사 중 피고 이가순은 동월 26일 경 전시 선언 발표 기일에 발표 해야할 경성 간부가 작성한 선언서의 도착 지연을 걱정하고 일면 그 도착이 될 것이라고 하나, 그 선언서는 수량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피고 이순영에 대해서 경성 간부로부터 보내 올 선언서 이외에 원산에서 선언서를 작성하여 인쇄 반포할 뜻을 설득한즉 동인도 이에 동의하므로 피고 이가순은 몸소 조선의 독립을 고취시킬 취지의 문서를 작성하여 이를 피고 이순영에게 보였는데 동인은 그 글 뜻에 승락을 표시하였으므로 여기서 피고 이가순·이순영은 그 저작한 것을 관헌의 허가를 얻지 않고 이를 인쇄 반포하기로 하고 동월 28일 피고 이가순은 원산부 진성(進誠)여학교에서 피고 차광은·함하은·정연수·인이극·이진구·김장석에 대하여 이어 동 부내에서 피고 차용운·김기헌에 대해서 조선독립을 위해서 이 운동을 전개할 취지를 설명한즉 동인 등도 이 거사에 찬동하고 이날 밤 피고 이순영은 피고 차광은 집에서 판시 선언서 인쇄에 종사 중, 동월 27일로 경성 간부의 선언서를 받았다. 피고 곽명경은 경성 간부가 작성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서 조선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취지의 기재가 있는 선언서 3백 매를 받아 가지고 왔었다. 전시 진성여학교에서 동지가 회합한 석상에서 각처로 배포하도록 피고 이가순에게 교부하였고 동인은 피고 이순영에게 교부한즉, 동인은 이를 받고, 전시 자기들이 작성한 문서에 독립선언서라고 제목한 손병희 외 32명의 명의를 기입하여 약 2천 매를 인쇄하고 여기서 이가순·이순영은 그 인쇄를 하고 동년 3월 1일 피고 이가순은 전시 곽명경이 가져온 선언서 중 50매를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하고, 이어 이가순·이순영은 그 남은 것과 자기들 저작의 인쇄된 독립선언서 약 2천 매를 원산부 광성학교 생도로 하여금 군중에게 배포케하고 일면 동일 오후 2시 경 원산부 원산리 시장에서 군중에 대하여 그 선언서에 근거하여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라고 선동하여 피고 차용운·차광은·김기헌·함하은·정연수·인이극·이진구·김장석 등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에 성원하여 군중과 함께 그 운동 방법인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원산 시가를 행진하여서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위 사실은 당 법정에서 피고 곽명경이 자기가 휴대하고 온 선언서의 매수는 약 100매라고 말하고 그 외에 피고 이가순·이순영·차용운·차광은·함하은·김장석·곽명경·김기헌·정연수·인이극·이진구의 판시 각자의 소위에 대하여 판시와 부합되는 취지의 공술 및 피고 곽명경의 영 제125호의 1은 자기가 휴대하고 온 선언서의 일부라는 내용, 피고 이가순의 동호의 1은 본 계획을 한 동지의 1인인 피고 곽명경이 이를 받은 것이고 경성으로 가서 받아 온 진성여학교 동지 회합 석상에서 자기에게 넘겨 준 경성 간부가 작성한 선언서 3백매 중의 일부이고, 동호의 2는 자기들이 인쇄한 독립선언서의 일부라는 취지, 피고 이순영의 동호의 2는 자기들이 인쇄한 것이라는 사실의 공술, 영(領) 제125호의 1인 선언서, 2인 독립선언서의 현존을 종합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에 비춰 보니 피고 이가순·이순영의 허가를 얻지 않고 출판한 저작 행위의 소위는 모두 출판법 제11조 제1항 제1호,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고 그 인쇄의 소위는 각 출판법 제11조 제2항·제1항 제1호,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고, 피고 이가순·이순영·차용운·차광은·김기헌·함하은·정연수·인이극·이진구·김장석·곽명경의 치안 방해의 소위는 범죄 후 형의 변경이 있었으므로 제8조·제6조에 의하여 신·구 양법을 대조하여 그 가벼운 구법을 적용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하고, 압수 물건 중 영 제125호의 1인 선언서 1통은 범죄의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제2항에 의하여 각 이를 몰수하고 기여는 형법 제202조에 의하여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원 판결에서는 피고 이계술·김진완에 대해 그 증빙이 충분하다고 인정하고 기여의 피고 11명에 대해 신·구 양법 대조를 하지 아니하고 보안법을 적용했으며 또 출판법 위반 소위와, 보안법 위반의 소위와의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인정한 것은 부당하므로 피고 13명의 공소는 각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형사소송법 제261조 제2항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인시봉(印詩鳳)

 성명 : 인세봉 印世鳳  이명: 印時鳳

생년월일 : 1892-08-03 졸년월일 : 1965-04-01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 천안군(天安郡) 천안읍(天安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는 이문현(李文鉉)·허병(許炳)·최오득(崔五得)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거사일 오후 2시 무렵,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군중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독려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힌 인세봉은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인진명(印振明)
생몰연대 : 1890.01.10 ~ 1940.08.29

인진명열사 사진

본      적 : 경기도 파주 廣灘 馬場 223
주      소 : 京畿 高陽 漢芝 新堂 蕪堂 39
공훈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2010)

진명은 1935년 서울 공덕동(孔德洞)에 있던 용일양조장(龍一釀造場)에서 이금진(李金振),윤락삼(尹樂三),최영진(崔榮鎭),구승회(具承會)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고관을 폭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평소 안중근(安重根),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 의사를 숭배하여 이들과 같은 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인진명 등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만주 침략에 대한 토론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활동 끝에 인진명 등은 조선총독(朝鮮總督) 우원일성(宇垣一成)과 정무총감 이하 각 고관을 폭살하고 철도와 체신국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인진명은 중석광산의 화약 취급 주임이었다. 따라서 동료들에게 폭탄 제조방법과 함께 화약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1935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폭발물 4개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하려고 하였다. 첫 번째 거사는 조선총독이 일본을 갔다가 서울역에 도착하는 시점으로 잡았다. 하지만 그 계획은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도 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조선총독이 온양(溫陽) 온천에서 휴양하고 돌아오는 기회를 포착,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근방에서 폭살하려다 이마저 여의치 않아 뒤로 미루었다. 인진명과 동료들은 폭탄을 다시 제작하여 효창공원(孝昌公園)에서 시험 폭파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인진명을 비롯한 동지들의 피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인진명은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7권 800~803면
-. 한민(1936. 8. 29)
-. 東亞日報(1936. 8. 18)
-. 朝鮮中央日報(1936. 8. 18)
-. 總督暗殺計劃者 檢擧에 관한 件(地檢秘 제9999호, 1936. 2. 8)
-. 朝鮮總督暗殺未遂事件 檢擧에 관한 件(京龍高秘 제11151호, 1936. 4. 24)
-. 朝鮮日報(1936. 8. 1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908면

 

 

 

인종익(印宗益)
생몰연대 : 1871. 2. 28 ~ 미상
출생지역 : 서울 종로
공훈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2010)
1919년 2월 말 이종일(李鍾一)로부터 조선독립선언서를 전주(全州)와 청주(淸州) 등지에 배포하라는 지시를 받고, 전주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였던 인종익은 1919년 2월 28일 오전 7시경 천도교 월보과장(月報課長)이자 보성사(普成社) 활판계장으로 근무하던 이종일로부터 전북 전주의 천도교구실과 충북 청주에 조선독립선언서 2,000여 매를 전달, 배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는 천도교에서 전국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전국 차원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곧바로 서울을 떠난 인종익은 3월 1일 전주에 도착하여 전주읍내 천도교구실에서 김진옥(金振玉)을 만나 독립선언서 1,700여 매를 전달하면서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곳에 널리 배포하도록 하였다. 김진옥은 전주 천도교구장 한영태(韓永泰)를 비롯하여 민영진(閔永鎭), 조성덕(趙聖德), 김성문(金成文), 김영호(金永浩) 등을 시켜 3월 2일 밤까지 사이에 전주 읍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어 3월 2일 청주에 도착한 인종익은 직접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견되어 청주경찰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일로 인종익은 1920년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 註 >
-.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1919. 8. 30)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2. 27)
-. 判決文(高等法院:1920. 4. 8)
-. 獨立運動에 關한 件 제14보(1919. 3. 13)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3집 95~121, 140~142면 제5집 104~123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제11권 318면
인재석(印載錫)

 

인국원(印國元)

 

인종명(印鐘鳴)
생몰연대 : 1864 ~ 미상
본      적 : 황해도 평산 上月 桃花亭
주      소 : 서울 東署 蓮花坊 田間 87-3
운동계열 : 의병
1907년 9월 黃海道 平山郡에서 朴基燮 義陣에 가담하여 傳令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5월 ~ 10월까지 서울에서 무기를 구입하려다가 체포되어 流刑 5年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운식(印雲植)

 1929년 가을부터 공주지방의 각 학교에서는 항일맹휴가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동년 12월 13일 밤에는 공주 금성(錦城) 보통학교 6학년 학생 일동이 ① 일본인 교사의 배척, ② 가혹한 교육 제도의 철폐를 내세우고 다음 날, 아침부터 동맹 휴학을 단행하기로 했으나 교원들이 총 출동하여 가정 방문 등의 방법으로 무마에 나섰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169)

대전 제2보통학교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 정세하에서 안일하게 공부만 할 수 없다하여 1930년 1월 24일, 첫 시간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에는 여학생이 적극적인 주동 역할을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월 24일 대전의 경찰은 아침 일찍 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6학년 여학생 김정순(金正順) 외 6명, 5학년 이순해(李順海), 남학생 이정근(李丁根)·김우익(金禹益) 등을 주모 학생으로 연행하였다.170)동년 1월 18일 당진 석문(石門) 보통학교에서 학생 궐기가 예상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당일 학생들의 책상에는 만세시위를 권장하는 격문이 뿌려졌다.171)석문 보통학교의 만세 계획 추진에는 기성인의 참여가 있었다. 그 주동자는 임종만(林鍾萬)·고인환(高麟煥)·인학수(印鶴洙)·인운식(印雲植)이다. 이들은 광주학생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서는 전국학생이 궐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1929년 12월 28일 경부터 신간회 당진지회를 중심으로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석문보통학교 학생들을 궐기케하는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학생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어 보통학교 학생의 책상에 투입 하였다. 특히 인운식(印雲植)은 당시 석문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면서 인 학수로부터 격문을 인수하여 직접 학생의 책상에 투입하였다. 이상의 주동자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인이식(印利植)

 

인경환(印景煥)

 

인종보(印鐘甫)

 

인영호(印永浩)

 

인건(印建)
생몰연대 : 1894-09-16~1960-07-17
본      적 : 황해도 평산 上月 桃花亭
주      소 : 黃海 平山 上月 綠灘 218
운동계열 :  

 

황해도 평산(平山) 사람이다.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연통부(聯通府) 등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세웠던 인건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가던 1917년 노령과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국제정세를 주시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활동할 뜻을 세우고 1920년에 귀국하였다.

귀향 후 그는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에서 평산청년회(平山靑年會)를 주도하여 조직하였고, 1920년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결성될 때 평산청년회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비록 일제의 허가를 받아 창립된 합법적인 등록단체였지만, 창립 당시 전국 각지에서 116개 청년단체 대표자 124명이 참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 이후 분산된 청년단체의 역량을 결집시켜 민족의식을 제고하고 청년운동을 대중화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같은 청년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면으로는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연통부(聯通府)의 평산군 군감부(郡監府) 산하 면사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7월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으로 세워진 연통부는 독립운동자금모집 및 임시정부의 선전, 민족의식의 고취, 독립운동세력의 규합 등을 주요 활동지침으로 정하였다. 이렇게 연통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연통부의 조직이 발각되는 것과 더불어 일제에 붙잡혀 1921년 10월 1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로 징역 1년 2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2년 10월 출옥 후 그는 무장투쟁에 투신하고자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하였다. 러시아군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1924년 5월 중국 관내로 건너가 운남사관학교(雲南士官學校)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그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중국군에 편입되어 1943년 중국군 장교로 광동(廣東)에서 활동 중, 일본군 특무대에 붙잡혀 국내로 이송, 연금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인원배(印元培)

 

인동철(印東哲)

 

인순창(印淳昌)

 

인길복印吉福

생년월일 1858'

본적:평안북도 의주 廣坪 上廣

주소:平北 義州 廣坪 上廣

 

1919년 3월 평북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에서는 우리 민족이 자결 독립을 결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3월 1일 이래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3월 14일 각 호에서 1인씩 참가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선언식에 참가한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불렀으나, 일본 경찰이 출동하자 해산하고 말았다. 그는 이날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0일 평양복심법원 및 1919년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인문환

성명 인문환(印文煥

0이명印文熄

생년월일: (1883)

사망년월일미상

본적 황해도 기타 면산 관동

908년 4월경 충북 충주군(忠州郡) 일대에서 의병 소모장(召募將) 강영학(姜永學)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해산군인이 참여하면서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충북 충주 출신의 강영학은 의병 소모장으로서 1908년 4월경 충주군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전직 원릉참봉(元陵參奉)으로 휘하에 의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각처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그 휘하에는 인문환을 비롯하여, 이달성(李達成)ㆍ손명선(孫明先)ㆍ김봉학(金奉學)ㆍ이성순(李聖順)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인문환은 소모장 강영학 등과 함께 1908년 4월 20일 충주군 복성면(福城面) 일원에서 활동을 하던 중, 충주경찰서 일본인 순사 3명과 한인 순사 6명으로 편성된 변장순사대의 공격을 받았다. 다음날인 4월 21일 강영학 등 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8년 12월 25일 충주구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인순창
성명 인순창 印淳昌
생년월일 : 1919-04-08
졸년월일 : 2010-01-23
본적 : 평안남도 진남포 府 明協洞 10
주소 : 中國 陜西省 西安
평남 진남포(鎭南浦) 사람이다. 중국군 군통국(軍統局) 요원으로 근무하다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 후 제9전구 적지공작원으로 북경(北京), 정주(鄭州) 등지에서 초모 공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인종명
성명
인종명
한자 印鍾鳴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1864)
사망년월일
미상
본적 황해도 평산 上月 桃花亭
주소
서울 東署 蓮花坊 田間 87-3

인종명은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으로 1907년 9월 평산군에서 박기섭의진(朴基燮義陣)에 가담하여 전령(傳令)으로 활동하였고, 1908년 5월부터 10월까지 서울에서 무기를 구입하려다가 체포되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 북부지방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의병 부대들은 여러 개의 소규모 부대로 분리되어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박기섭의진,민효식의진(閔孝植義陣),허덕천의진(許德川義陣),이진룡의진(李鎭龍義陣),지홍기의진(池洪基義陣),연기우의진(延基羽義陣),박장옥의진(朴長玉義陣) 등이 있었다.

1907년 8월 황해도 평산에서 창의한 박기섭의진은 중군장 우병렬(禹炳烈), 유격장 이진룡(李鎭龍)을 주축으로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진룡은 1908년 말 강화도에서 온 지홍기부대(池洪基部隊), 황해도의 연기우부대(延基羽部隊)와 연합하여 1911년까지 황해도,평안도,강원도 등 3도에 걸쳐 치열한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인종명은 1907년 9월경 박기섭의진에 참여하여 전령에 임명되었다. 중군 우병열과 협의하여 1908년 5월경부터 동년 10월까지 경성에서 총 500 자루를 구입하려다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08년 11월 30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유형(流刑) 5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裁判所:1908. 11. 30)
인종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