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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태사공(太史公)의 서문과 소노천(蘇老泉)의 족보에도 선조를 추모하고 일가에 화목하는데 의의를 둔 것인즉, 이제 우리 집안의 족보하는 일이 어찌 쉽다고 하겠는가. 슬프다. 삼가 좌씨전(左氏傳) 및 계고집성(稽古集成)을 참고하건대 우리 일가의 성씨 된 것이 원래 정(鄭)나라에서 나왔다. 정나라 칠목(七穆)중에 자인(子印)이 있고 그의 손자에 자석(子石)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이름자(子印)를 따서 성씨를 삼아 이름을 단(段)이라 하니 이 분이 우리의 시조가 되며, 아들 계(癸)가 있는데 자산(子産)과 함께 같은 시대로서 시전(詩經)의 실솔장(蟋蟀章) 및 탁혜장(蘀兮章)에서 가히 상고(可考)해 보게 되나 역대가 이미 멀어서 족보에서 증거치 못하니 크게 탄식되도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十二年에 아찬공(阿餐公)께서 신라로 사신 나오사 교동백에 봉케되어 성씨의 본관(本貫)이 되었으니 실로 우리나라 인성(印姓)의 시조라 하겠다. 대대로 큰 벼슬(世公世卿)을 하셨으나 여러 번 난리를 지내오매 문헌에서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며,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학사공(휘 邠)의 문장과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의 공훈과 업적은 고려사에서 가히 증거할 수 있다.

이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함산군(咸山君 : 휘 元寶)께서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서 형조판서에 봉하여 지극한 봉작이 있었으니 이는 국사(國乘) 및 세계(家系)에서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는 여러 대를 음관(蔭官 : 선대공훈으로 자손이 절로 벼슬하는 것) 하시다가 시골로 낙향하여서는 더욱 한미(寒微)케 되었으니 선대를 추모하건대 어찌 마음이 상하고 슬프지 않으랴. 내가 병술년 족보할 때에 나이가 四十一세여서 인쇄의 끝자리에 참여하였었는데, 헌종 무신년에 다행히 진사에 급제하니 선대의 덕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닌가. 감격하여 눈물 질뿐인데 이제 나이가 七十九세라 뜻있는 여러 일가와 함께 감히 이번 보첩을 중수케 되었으나 정신이 혼미하여 능히 나아가 선대의 훌륭함을 천명하고, 또한 후손들을 잘 개도(開導)치 못하고 태사공(太史公)과 소노천(蘇老泉)의 선조를 추모하고 일가에 화목해야 한다는 그 뜻에 취할 것이 많다는 것만을 일러 말하는 바이다.

갑자 1864년 중춘상한(仲春上澣) 58세손(면천) 진사(進士) 재현 謹序

 

 

편찬위원
도 유사 재현(면천)
부 유 사 육상(덕산)
수단유사 영국(덕산) 영하(덕산) 범석(면천)
별 유 사 재탁(면천) 도수(면천)
교정유사 경석(면천) 두배(덕산) 광수(면천) 홍식(면천)
감인유사  세권(덕산) 기영(천안) 규배(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