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보(1891) 교동인씨 역사 > 교동인씨 가장록 > 신묘보(1891)
무자보(1768)
병술보(1826)
갑자보(1864)
신묘보(1891)
병자보(1936)
임인보(1962)
갑자보(1984)
 
58세손 덕산파 영하
사람의 집안일에는 불행과 불우(不偶)한 운수가 있고, 만물의 이치에는 나간 것을되받고 태평함이 돌아오는 운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행하다가는 또 행복해지는 수가 있고, 만나지 못하다가 또는 만나게 되는 수가 있도다. 이치가 정당한데 일이 잘되지 않음이 있지 않으니 운수가 혹 막혀도 능히 창성함이 어찌 없으리요. 이로써 우리 인씨가 문의 불행과 다행함과 만나지 못함과 합함을 진실로 미루어 알 수 있도다.옛적에 우리 시조이신 아찬공(휘 瑞) 이후로 몇 十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만나 문헌이 보존되지 않아 세월이 오래되매 파계(派系)가 실전되어 가히 고증할 수가 없으니이는 우리 인씨 후손의 통한이 골수에 사무칠 일이니 어찌 종사(宗事)의 일대 불행이 아닌가. 그 후로도 어사공(휘 毅)으로 부터도 비록 족보는 있다고 하되 다만 대체(大都)만 있게 된 것이다.

나의 五세조이신 유장(有章)께옵서 널리 국사를 고증하고 처음으로 족보 일을 시작하여 경향각지의 여러 일가를 모으시고 서문을 병계 윤선생에게 청하여 일을 마치신 후에야 우리 집안 자손의 지손과 종가와 선대 사적의 빛남을 이에 밝게 알게 되었으니 크게 우리 종중에 공이 있으셨으니 이는 인문(印門)의 첫째가는 경사이다. 나의 십세(十世)조 전후에 있어서는 벼슬이 맑고도 현저하신 어른이 많고, 벼슬이 대대로 계셔서 초당공이신 빈(邠)께서는 문장과 업적이 세상 선비의 모범이 되셨고, 석성 부원군이신 당(璫)께서는 적도를 토벌하신 공훈이 있으셨고, 칠세조(七世祖) 여규(如圭)께서 는 특히 효행이 있으셨다. 비록 정문(綽楔)은 받지 못하였으나 사적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고, 선비들이 올린 단자(單子)도 지금까지 전해오니 이것은 태평성대를 당하면 이룩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모든 파(派)의 자손들이 많기는 하나 시골에만 묻혀서 겨우 성명만 보존(僅保姓名)하여 선조를 나타내고 전의 훌륭함을 계승하지 못하니 이는 우리 인씨가 비색한 운수를 만남인가? 지난 병술보 재간행 때에 재종조이신 현국(顯國)씨께서 비로소 五世조부의 옛 사적을 기록하여 이어서 일을 끝맺으셨고, 그 후 갑자년에 족형이신 진사 재현(載鉉)씨께서 다시 선대의 훌륭함(前武)을 이어서 편찬하셨고, 이제 또 족보를 간행케 되매 내가 재현(載鉉)씨의 손자인 영철(永哲)과 함께 지혜를 합하고 일을 주관하여 같이 유사(有司)의 명의를 띠고 바야흐로 인쇄(鋟梓)의 일을 우리 집과 진사 족형댁에 설치하였으니(駐 : 이때까지는 本版인쇄였음) 이 또한 만나지 못함이 합함(不偶之合)이로다.

그러나 사물은 또한 불운이 태평케 되는 이치가 있고 일에는 반드시 합함이 있나니 우리 일가의 모든 후손은 반드시 선대의 어짐과 음덕의 행실을 이어서 각자가 충효와 덕의(德義)를 힘쓰면 이치에 어찌 끝내 비색(否塞)한 운수만 있으며 사람이 어찌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 합하는 경사가 없겠는가. 내가 불초한 이손(耳孫)으로서 학식까지 없는데 어찌 감히 보첩에 발문(跋文 : 끝맺는 말)을 쓰겠는가마는 고루한 소견으로도 오히려 선조의 돈목과 효도와 옳은 행실을 추모하고, 또 우리 일가의 침체된 부끄러움에 느낌이 있어서 그 외람되고 주제넘음을 잊고 불운(不運)이 지나면 태평함이 온다는 이치와, 행운과 불우(不偶)의 운수를 써서 이르는 바이다.

 

 

56세손 장단파 영철
우리 인씨의 옛 족보가 난리에 잃었더니 영조때에 덕산양촌(陽村 : 지금 예산 德山) 종중에서 비로소 창간합보(創刊合譜)하니 이것이 무자보(戊子譜)가 되고, 五十九年이나 오래되어서 이어 간행하니 이것이 병술보(丙戌譜)가 되고, 또 三十九年이 지나서 다시 하니 이것이 갑자보(甲子譜)가 되는데, 병술보(丙戌譜)와 갑자보(甲子譜)는 나의 돌아가신 조부님과 선친(先考)께서 모두 그 일을 맡아 하셨는데, 지금 二十七年째가 된다. 영철(永哲)이가 불초하나 족보를 중수(重修)하는 때를 맞으매 일가의 날로 멀어짐을 생각하고, 가문의 전통을 잊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여러 일가로 더불어 속간(續刊)할 것을 합심 의논하여 각도의 종중에 글로서 알리었다.

이에 일가사람 영기(永璣), 종화(鍾和)씨는 영남을 가고, 관수(寬洙), 용식(容植)씨 는 호남을 가고, 도석(道錫), 홍식(弘植)은 해서(海西 : 즉 平山, 松都지방)로 가고, 익수(益洙), 용수(龍洙)씨는 호서지방의 여러 읍을 다니었는데 마침 잡초가 무성하게 나서(蕉苻竊發) 도로에 막힘이 많았는데도 여러분들이 어렵고 험함을 무릅쓰고(註 : 이때는 차량이 없는 시대임) 머나 가까우나 가서 말하매 여러 일가들이 듣고는 즐거이 따르지 않음이 없어서 각파 수단과 명하전(名下錢)을 거두어 보내주어 인쇄에 맡기매 몇 개월이 지나 마치게 되어 이 책과 같이 되었도다. 슬프다! 우리 인씨의 떨치지 못함이 오랜지라 이같이 보통에 지나지 않는 보첩을 돌아보매 어찌 족히 세상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적의 산동대족(山東大族)과 강주(江州)의 진씨(陳氏)와 포강(浦江)의 정씨(鄭氏)가 모두 세상에서 칭송하였음은 비단 벼슬의 문벌만을 따진 것이 아니고 능히 그 종법(宗法)을 닦음으로써 대대로 돈목(敦睦)의 가풍을 이음인 것이었다.

옛 사람들이 진긍의(陳兢義)의 문중일을 논하기를 “세가대족이 그 숫자가 많지 않음이 없으되 겨우 一~二대의 융성(隆盛)에서 그친 것은 그 근본이 굳건치 못하여 가지와 잎새가 쉽게 말랐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저 진씨(陳氏)들은 효도와 공경을 세워서 그 근본을 굳게 하고, 행실과 의(義)를 추진하여 그 가지에도 이르게 하므로서 덕이 여러 대를 흘러서 빛을 책에까지 밝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인씨의 일가들이 집이 가난하고 흩어져 살아서 비록 능히 진씨(陳氏)의 구세동거(九世同居)와 같이는 못하나 진실로 능히 이 족보를 부지런히 닦아서 후생의 소원한 사람(後生疎屬)으로 하여금 근원을 탐구하고, 내 몸을 알아서 대대로 돈목의 정의(情誼)를 잃지 않는다면 비록 만 리 밖에 있더라도 같은 방안과 같으리니 선대 어른(先人)의 족보 닦기에 고심하신 그 정신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한다.

 

 

60세손 덕산파 현갑
족보란 것은 위로 선조를 잇고 아래로 후손을 이어서 그 맥락(脈絡)을 짓고 조리(條理)를 잃지 않음을 이름인 것이다. 우리 인성(印姓)이 모두 전세(前世)의 벼슬(簪纓)한 집안으로 후세(後世)에 와서는 점점 한미(寒微)함에 이르고, 각처에 흩어져 살아서 비록 아무 존재가 없음에 이르렀으나(泯沒無聞之境) 혹은 파보를 간행하고, 혹은 세계(世系)를 전하여 각자 인자(印字)로 성씨가 된 것만은 보존하고 있으니(各保印字之爲姓) 어찌 다행하지 않으냐. 옛적 무자년에 호서지방으로부터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고, 이어서 거듭된 것이 병술, 갑자의 두 해(丙甲兩年)로되 멀리 떨어져 살아서 완전히 합하기가 어려웠고 혹은 함께 하지 못하기도 하여 지금껏 탄식하였더니 지난 경인년 봄에 족조 영하(榮厦 : 이름자)공께서 합보(合譜)의 뜻을 팔도의 모든 일가에게 통문을 돌려서 이 막중한 일을 시작했는데 나같이 학식이 없는 몸으로 어찌 감히 인쇄의 끝에나마 참여하랴마는 명령이 지극히 후하여 한편의 책임을 맞게 되었다.

슬프고 아프도다. 지난 구월에 영하(榮厦)공께서 갑자기 불행을 당하사 품으신 뜻을 모두 이루지 못하셨으니 뉘가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랴. 공의 서문 한편이 지금 상자속에서 나오니 이것은 병환중에 쓰신 것이매 이 글을 보매 스스로 감회가 더욱 새로워짐을 금치 못하겠으며 지금도 눈물이 흐르게 된다. 이에 인쇄에 올리매 이어서 간략히서문하여 이르노라.

 

 

57세손 함창파 종식
슬프도다! 근원에는 백파(百派)의 조류(潮流)가 있고, 나무는 일천 가지의 무성한 잎 새가 있으니 무릇 사람이 조상이 되고 손자가 됨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니, 같은 근원과 같은 근본의 뜻인즉 어찌 아름답지 않으냐? 슬프다! 태사공(太史公)의 자서(自序)와 소노천(蘇老泉)의 족보에도 선대를 잇고 후손을 돕는 뜻이 아님이 없으니 가히 우러러 사모할 만 하지 않으리. 우리의 인씨가 대개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증손 칠형제 중의 한분(七穆之一)에게서 나왔고, 진나라(晋) 혜제(惠帝)때에 이르러서 풍익대부(馮翊大夫)이신 휘 서(瑞)께서 신라에 사신을 나오시매 신라 왕이 아찬 벼슬을 내려 교동백에 봉하니 이 분이 동래시조(東表始祖)이신 바 그 뒤로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에 올랐으나 여러 번 난리를 지나 문헌으로 증거할 수 없으니 가히 탄식되도다. 고려 인종때에 이르러서 어사공(휘 毅)께서 계시는데 아찬공(휘 瑞)이후로는 역년(歷年)이 오래됨에 세대가 누락되어 몇 대손이 되는지 알지 못하여 인종때에 이르러서야 한림학사공(휘 邠)의 문장과 석성부원군이신 휘 당(璫)의 무예가 찬연히 기록되었고 이조에 이르러서는 익대공신으로서 휘 원보(元寶)께서 형조판서와 함산군(咸山君)에 봉해지신 것은 역사와 족보에서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 후손이 시골과 강호(鄕湖)에 흘러가 삶에 점점 더욱 한미(寒微)해 졌으니 어찌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으랴. 슬프도다! 족보를 생각건대 갑자년의 족보한지가 지금까지 二十八年이나 되는데 선대의 훌륭함을 찬양(贊揚)하고, 후예(後裔 : 즉 後孫)를 가르치는 것이 족보를 닦는 이 일보다 더 큼이 없으므로 족숙 영철(永哲)씨가 사종형 홍식(弘植)씨와 더불어 다시 발간을 합심 계획하여 팔도에 통문을 내었으니 그것은 조상을 높이고 일가에 화목하는 의(誼)에서 나온 것이다. 돌아보고 생각건대 종식(宗植)이가 지금 나이 三十으로 학식이 천박하여 힘을 다해 함께 일하지 못했고, 또한 작은(區區) 정성으로써 능히 한마디의 말을 그 사이에 끼어서 이르는 바이다.

 

 

57세손 온양파 면학
우리 인씨는 주(周)나라로 조상을 하였으니 정나라 목공(穆公)의 증손이신 단(段)께서는 칠목(七穆)중의 한 분으로 할아버지(王父)의 이름자 ‘子印’에서 인(印)을 따서 성(姓)을 하셨고, 중간에 와서 풍익공(馮翊公 : 휘 瑞)께서 신라로 사신 오시매 신라에서 아찬과 교동백이 되셨으며, 공에게서 고려의 시어사공(侍御公 : 휘 毅)과 이조의 함산군(咸山君 : 휘 元寶)에 이어졌으니 진실로 그 근원을 생각하면 비록 우리나라의 세상에 빛나게 벼슬한 집과 큰 집의 세족(世族)들이 함께 할 수 없다 하겠다.

그러나 아찬공(아찬공 : 즉 휘 瑞)에서 어사공(御史公 : 휘 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대수(代數)로 족히 三十대가 되고 연수로는 八백여년이 넉넉히 될 것이나 처음부터 첩으로 가히 고증할 수가 없으나 모두 말하기를 여러 번 난리를 만나 문헌으로는 증거할 수 없다고 하나 이것은 모두 범연한 말이라 하겠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기자 조선에서 열렸다 하나 세상이 어두워서 사대부(士大夫) 집들이 보첩을 만들지 아니한 때문이다. 진실로 보첩이 있다면 각파마다 간직하고 집집마다 마련하여 사람이 항상 눈으로 보아서 지금의 사대부(士大夫) 집과 같이 하였다면 비록 난리의 불속에서라도 반드시 모두 다 잃었을 리가 없을 것이요. 설혹 모두 잃었더라도 자손 중에 죽지 않고 총명한 사람은 가히 외워서 전하여 기록하여 족보를 다시 만들었을 것인데 지금같이 전연 고증할 수가 없어서 막연한 처지인 것은 보첩이 서 있지 않았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영조 무자년에 비로소 보첩을 만들매 병계 윤선생께서 서문을 만드셨고, 또 지금 임금 갑자년에 족질 진사 재현(載鉉)씨와 영국(榮國)씨가 거듭 간행하였는데 대개가 위로는 선대의 실전을 통탄하였고, 중(中)으로는 씨족의 계통을 밝히고, 아래로는 후손들이 이어서 만들라고 하여 인하여 우리 인씨 일가들이 계통이 있음을 얻었도다. 갑자년으로부터 지금까지 연수가 비록 많지 않다하나 오래되면 계승하여 기록함이 없을까 두려워하게 되어 이에 또 거듭 발간하노니 만약 이번 족보로 하여금 파파(派派)마다 간직하고 집집마다 간직한다면 가히 만의 하나라도 유실(遺失)될 염려가 없고, 또 자손 중에서 선조를 사모하고 일가에 돈목하는 사람이 한 대(世)마다 한 사람이 나와서 항상 三~四十년로써 주기를 삼아 다시 발간한다면 비록 백대까지 멀게 되더라도 가히 막힘이 없을 지어다.

 

 

61세손 평산파 월규
무릇 보(譜)란 글자는 언(言)자와 보(普)자가 합한 것이다. 넓은 하늘아래에 인(印)으로써 성씨가 된 사람이 같은 뿌리의 소생 아님이 없고, 또한 같은 할아버지의 손자 아님이 없으니 같은 할아버지의 사람으로서 어찌 조상을 생각하는 정성이 없으며, 같은 뿌리의 일가로서 또한 가히 일가에 화목하는 정의(情誼)가 없으랴. 일가와 화목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족보가 아니면 어찌 어느 곳의 일가와 어느 쪽의 일가가 나와 같은 집안의 사람이며, 이 족보가 없으면 어느 파의 일가와 어느 일가의 어떤 파가 나와 같은 조상이 파가 됨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조상이 같은 파를 알고져 하면 족보를 같이 하는 것과 같음이 없고 같은 파의 손자임을 알고자 하면 또한 족보를 넓게 함과 같음이 없으니 넓은 의미로 족보를 함께하면 조상을 생각하고 일가에 화목하는 정성이 스스로 그 가운데에 있을 것이요, 조상을 생각하고 일가에 화목하려면 같이 족보하는 정의(情誼)가 또한 그 밖에 있지 않으리라.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성씨로서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호서 일가 어른(宗丈)이신 유장(有章)씨와 홍신(弘信)씨께서 지난 무자년에 비로소 족보를 만드시니, 우리의 인씨에게 크게 공이 있으셨고 나의 고조부께서 또한 족보 만듬에 뜻을 두었으니 무자년 창간 때에 호서와 해서(海西 : 즉 황해도)지방으로 서로 격(隔)해 있어서 미처 알지를 못하였고, 그 후 十四년 신축 여름에 우리 파의 파보만 다시 하게 되었으니 가히 한탄되도다. 지난 병술년에 면천의 일가 어른이신 진사공 재현(載鉉)씨께서 이어서 족보를 만드시니 또한 크게 우리 인씨에 공이 있었고, 그의 아들 동몽교관공 범석(敎官公範錫)씨가 지난 갑자년에 훌륭함을 이어서 족보를 만드시니 이 크도다. 내가 성의가 적고 효성이 엷어서 또한 족보하는데 뜻을 둔지가 오래되었으나 간간이 일이 있어서 경황이 없더니 마침 진사님의 손자이신 영철(永哲)씨께서 지난 경인년 봄에 또한 슬픈 마음이 드셔서 족보를 다시 하고자 하여 각파의 여러 일가에게 통문을 내니 인성(印姓)이 된 사람으로 뉘가 즐겨 따르고자 하지 않으며, 누가 응하여 일어나지 않으리오.

수단을 닦고 재물을 모음이 물이 아래로 내림과 같아서 불과 二년만에 족보 일을 이루게 되니 어느 일가가 인씨가 아니며 어느 파가 인씨가 아니리요. 홀로 이런 일가는 (永哲씨를 말함) 조부, 아들, 손자의 三대가 이어서 족보를 만들었으니 실로 우리 인씨의 으뜸이요, 또한 우리 인씨에 공로가 되었으니 어찌 장쾌하고 훌륭하지 않으냐. 슬프다! 교동백 이후로부터 우리 인씨의 성(姓)이 우리나라에 나타나서 벼슬의 무성함이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다가 근래에는 벼슬(縉紳)을 한 일가가 매우 적으며, 한 파는 남에 있고 한 파는 서쪽에 있어서 이 족보가 없으면 남쪽 가운데의 파가 어찌 서쪽 땅에도 한 파가 있음을 알겠는가. 이제 서쪽 땅과 남녘이 통보(通譜)하게 되니 가히 같은 할아버지의 조상 생각하는 정성을 알겠고, 또한 동족끼리 일가에 돈목해야 하는 정의(情誼)를 알게 된다 하겠다.

 

 

63세손 송도파 승학
사람에게 큰덕(德)과 절개가 있음이 대개 산천의 원기가 모여서 되나니 주(周)나라의 신보(申甫)같은 이는 숭악산(崇嶽)에서 태어났고 송나라의 여러 어진 이들은 염락(濂洛)에서 나셨으니 이로써 어질고 호걸한 분의 나심이 모두 땅의 신령스러움을 타고나셨던 것이다. 생각건대 교동은 위로 화개산(華蓋山)이 있고 아래로는 인점포(印岾浦)가 있으니 반드시 훌륭한 덕망의 어른들이 이 원기를 타고나서 크게 세상에 울렸다 하겠다. 우리 인씨가 비로소 그 아래에 살아서 대대로 영화를 나타냈으니 빛남인 즉 화개산의 맑은 기운을 타고난 것이며, 대대로 칭송하는 분이 계시니 그 분은 인점포(印岾浦)의 덕성스런 물결에 젖어서 그리되신 것이니 이것이 산천의 신령함이 모여서 사람이 되었고, 이름이 또한 사람으로 인하여 중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진(晋)나라 혜제 十二년에 신라로 사신 오시매 신라왕이 청백으로써 교동백에 봉하니 우리나라의 인씨 있음이 이로부터 비롯되었고, 고려에 이르러서 대대로 장수와 정승이 계셨고 이조에 들어와서는 익대공신으로써 함산군(咸山君 : 휘 元寶)에 봉해지셨다.

그 후로는 여러 대를 음덕으로 벼슬(蔭仕 : 선대의 공훈으로 자손에게 자동적으로 내리는 특전의 벼슬제도)하다가 경기, 호서, 호남, 영남, 해서(황해도)에 흩어져 살매 파와 가지가 번성하여 뻗치었으니 어찌 선대의 훌륭한 음덕이 아니겠는가? 대개 성(姓)이 있으면 족보가 있음은 천하의 인정인 것은 다름없이 일치하는데 우리 인씨는 또 더구나 성이 벽성(僻姓)인데 일가에 돈목마저 없다면 이미 사람의 일에서 최대의 것이 가벼이 된 것이며, 어찌 중간에 쇠약됨을 한탄케 되는 심정이 없겠는가? 이러므로 세대가 멀어져서 남과 같이 되어 친함이 다하지 않는 처지로되 그 얼굴로 서로 알지 못하고, 일가가 멀지 않은 사이에도 서로 누군지 알지 못하고 파계(派系)와 소목(昭穆)에 이르러서도 혹은 그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게 되리니 이 어찌 크게 두렵지 않으냐? 또 한사람의 몸이 나뉘어 형제가 되고, 형제가 나뉘어 기공(朞功 : 一년 服과 五월 또는 九월의 服 입음을 말함)이 되고 기공(朞功)이 시마(緦麻 : 三月服 입는 것)가 되다가 친함이 다하매 노상행인과 같이 되게 되니 또한 한심하지 않으냐. 우리의 같은 성은 가히 가문을 높이고 근본을 중히 여겨 노상행인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하겠다.

또 족보하는 일이 근엄하고도 어렵고 조심스러우므로 선배 어른들께서 감히 갑자기 하시지를 못하시매 한스럽던 것이 이미 여러 해였다. 지난 기미년에도 나의 종형이신 서학(緖鶴)씨가 비로소 족보를 하자고 발의하였으나 재력이 넉넉지 못하여 다만 우리 파보만 하고 말았다. 경인년에 이르러서 호서지방의 여러 일가들이 이어서 이 의논을 발하매 각자 서로 응하고 수단(收單)을 시작하여 더욱 바로 잡아서 와전된 것을 가려내고 비교하여 신묘년에 이르러 인쇄를 마치게 되니 어찌 우리 집안의 춘추(春秋와 같은 책)가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승학(承鶴)이가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이에 군더더기로 붙인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주제넘음을 면키 어려우나 공경히 사모하는 정성으로 이에 써서 이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