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득관 유래 | 교동인씨 역사 > 시조 득관 유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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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시조) : 인서(印瑞)
단(段)의 후손 서(瑞)가 진(晉)나라 풍익(馮翊) 땅의 대부(大夫)로서 신라 제14대 유례왕(儒禮王) 14년(297년)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아찬(阿湌)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이르러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가 되었다.
창성(創姓) 유래
교동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으로 「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의 이름인 「자인(子印)」의 「인(印)」자(字)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段)의 후손인 인서(印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신라 유례왕(儒禮王) 14년(서기 297년)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아찬(阿 )의 벼슬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 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喬樹)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빈이 교동인씨의 시조로 되어왔으나 《교동인씨세보》(1936년)에는 빈의 후손 당( )이 시조(1세)로 되어 있다. 당은 공민왕 때 서북면병마사로서 압록강 서쪽의 파사부(婆娑府) 등 삼참(三站)을 공략하고 개척한 공으로 참지정사에 올랐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고려 충렬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始祖)로 하는 「연안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시대에 교동인씨 중 유일한 문과급제자는 석보(錫輔)로, 고종 때 경과별시에 급제했으며 문명이 높았다. 연안인씨의 시조는 후(侯)로서 그는 원(元)나라 사람인데 고려 충렬왕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들어와 검교정승을 지냈으며, 아들 승단(承旦)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자손이 연안에 관적하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의 아들 완 (完)이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를, 증손 현원(玄元)이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그리고 현손 정(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의 9세손 당은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로서 참지정사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를, 해(海)가 이부시랑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 중보(重寶)가 상장군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 철관(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때 정난원종이등공신에 오른 발(潑), 도총부 부총관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내었다.
본관 지명 유래
경기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서 해중(海中)의 섬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교동현으로 개명하여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계속하여 교동현이라 하였고, 1629년(인조 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강등(降等)되어 강화군(江華郡)에 예속되었으며, 1914년 군을 폐하고 강화(江華)로 합(合)했다.
인구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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