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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는 교동인씨 41세조이시며 아버님은典法判書(전법판서)를 지내신 諱 印做(인주)이시고 어머니는 청주이씨입니다. 할아버님은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을 지내신 諱 印公秀(인공수)이시며 조모님은 판삼사 김지숙의 따님(광산김씨)이십니다. 증조부는 중랑장, 병마절제사, 병부상서를 지내신 諱 인대신이시고 그 윗대조로는 문과에 올라 평장사를 지내시고 석성군에 봉해지신 諱 인정(시호는 충정공)과 판이부상서를 지내신 인규, 형부상서를 지내신 인완, 문하시중을 지내신 인빈께서 계십니다.

공의 아드님으로는 공민왕때 전리판서를 지내시고 연성군에 봉해지신 諱 印安(인안)과 이부시랑을 지내신 諱 印海가 계시고 손자분들로는 고려말에 대장군을 지내신 휘 인영보公과 우왕때 소용장군을 지내신 諱 인중수, 전농소윤을 지내신 인 인기, 호조전서를 지내신 인광보, 판밀직사를 거쳐 함산군에 봉해지신 諱 인원보, 상장군을 지내신 인중보公께서 계십니다.

교동인씨의 중시조이신 諱 당께서는 일찌기 문과에 올라 代言(승지와 같은 벼슬)을 거쳐 충혜왕복위 4년(1343년) 12월에 왕명으로 죄인을 원나라에 압송하기 위해 元을 방문하셨으며 충목왕1년(1345년) 4월에 밀직사가 되셨다. 충정왕 3년(1351년) 8월에왜선 130척이 인천부근 섬으로 침입하여 公께서 서북면만호로서 西江에 주둔하여 이를 방비하셨고 이어서 왜적이 남양쌍부현(지금의 안산지역)에 침입하자 공께서 이를 막으셨다.

공민왕 1년(1352년) 7월에 공께서 왜선을 나포하자 왕명으로 동지(東池)에 띄우게 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관람케 하였다. 동년 8월에 포왜사(捕倭使)가 되시어 금군(禁軍)과 東西江 교동의 뱃사공 1천을 거느리고 왜적을 방비하셨다. 공민왕 3년(1354년) 6월에 전라도만호로서 왜적을 포로로 잡아 국법으로 다스렸다. 이어서 원나라의 내란시에 공민왕의 명으로 원군(援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공께서는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의 봉군을 받고 동년 7월에 유탁, 염제신, 권겸, 나영걸, 김용, 이권, 최영 등과 같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가셔서 당시 북경에 살던 고려사람 2만여 명과 함께 참전하셨는데 고우성, 육합성 전투에서 용맹히 싸워 장사성(張士誠)과 주원장(朱元璋)을 괴롭혔고 이때 공께서 참모로서 활약하시고 이듬해 乙未 5월에 귀국하셨다. 공민왕 5년(1356년)에 동지밀직사가 되셨으며 이후 공민왕이 친원파 기철, 권겸, 노책을 목베이고 공을 첨의평리로 삼았으며 이어서 원나라가 설치해 놓은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 理問所)를 폐지하고 옛땅 쌍성탈환작전을 계획하면서 공을 서북면병마사에 임명하고부사(副使)로는 신순, 유홍,최영, 최부개 등으로 정하였다. 이에 공께서는 동년 6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즉 九連城의 三병참기지를 격파하여 원과의 연락망을 끊어놓고 유인우를 도와 쌍성을 수복하였다. 이에 원나라는 국경침범을 문책해 오면서 80만대군으로 고려를 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인당장군은 원병을 청하며 이의 방비를 극력 주장하셨고 동년 7월에 조정에서 관제를 고치면서 공을 參知政事(참지정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元의 재차 추궁에 당황한 공민왕에 의하여 公께서는 국가를 위해 전책임을 혼자 지시고 동년 7월 30일에 목숨을 나라에 바치셨다. 개성 남대문 종경에 '첨의평리 사사 인당'이란 여덟 자가 새겨져 내려오고 있다.

公의 부인은 해주최씨로서 판밀직 崔安道(최안도)의 따님이시며 면양군 具藝(구예)의 외손녀이시다.

인당 장군의 묘소는 개성 북산 효청동에 있고 충남 당진군 면천면 죽동리에 공의 사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