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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세손 함창파 태국
족보라 함은 한 집안의 역사이다. 위로는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을 잇고, 아래로는 자손이 나뉜 것을 분변케 하여 흐름을 찾으매 그 근원을 알게 되고 잎 새를 찾으면 그 뿌리를 알게 되나니, 근원을 알고 뿌리를 알면 효도와 공경이 생기고 일가에 돈목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족보를 중하게 여겨 전하는 것이다. 우리 의 인씨가 학사공으로서 중시조가 되시는데 경사를 쌓고 어짐을 많이 하시고 몸소 힘써 후손을 보호하시었다. 근본과 가지가 번창하매 八도에 흩어져 살게 되매 한 분의몸이 나뉘어서 노상의 행인이 되기에까지 이르러 서로 묻고 듣지 못한지가 대개 오래였더니 계유년 봄에 호서 영남의 여러 일가가 모여서 말하기를 “경인년에 족보를 한 이후로 세월이 오래되고 세상에 난리가 있었으며 이미 두어 대가 지나서 생일 졸일(卒日)과 묘소, 또는 소목(昭穆)이 아득해져 증거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옛날 한나라 말기(漢末)에 족보를 잃음이 많아서 자손들이 능히 선조를 말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어찌 우리가 오늘날 두려워 할 것이 아니냐?”하고 드디어 통문을 내서 두루 알리매 모두 찬성하였다.

일은 크고 힘은 많이 들게 되어 지연케 된 것이 지금까지 四개년이나 되었더니 금년 봄에 호서의 유사(有司)가 五백 리를 발 벗고 와서 영남 호남을 분주하게 다니면서 고심(苦心)하고 정성을 쌓아서 날짜를 정해 놓으매 몇 달이 안되어 족보 일을 끝마치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문중에서 백년을 겨를이 없어 못해오는 성대한 일인 것이다. 태국(兌國)이가 노병이 들어 먼 곳에 엎드려 있으나 그 추모의 정성을 공경하고, 그 일가를 거두는 의(誼)에 감복되어 八十 노인으로 고루하고 글은 못하나 가히 한마디를 아니할 수가 없어서 서차와 전말을 아뢰노니 우리의 족보를 함께 한 사람들은 효도와 공경을 돈독히 하고 충성과 믿음을 존중하여 힘쓰고 부지런히 한다면 다하지 않은 경사가 이에서 있게 될 것이다. 시전에 이르지 않았는가 “아들과 손자들이 그침이 없이 이어서 이끌어가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오는 후손에게 축원한다 이르는 바이다.

 

 

60세손 덕산파 현기
인씨의 계통은 신라 유례왕 때에 나왔는데 자손이 대개 적지 않되 교동으로 본관을 한 사람은 즉 한 파(派)라고 하겠다. 그 근원이 멀으므로(遠) 조상은 같되 집안(宗)이 다르고 파(派)가 다른 관계로 일가를 나누어서 각기 족보를 하는 것은 그 형편으로 인한 것이라 하겠다. 고려에 있어서는 대대로 큰 벼슬에 올랐고 가문(門楣)의 빛남이 이에서 성대하더니 이조 중엽으로부터 가문의 복이 적어서 자손(雲仍)이 번성치 못하고 나타난 사람이 적게 되어 이에 난리에 잃어버려서 파계(派系)가 자세히 알 수 없게 되매 八도로 흩어져 삶에 일가들이 혹은 길거리의 사람같이 되어 갔으니 종파(宗派)의 서로 이음과 지파(支派)의 방계(傍例)와 항렬같은 것을 어데로 좇아 그 자세한 것을 얻을 것이냐.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형제가 되고 형제의 몸이 공시(功緦 : 小功은 五月, 大功은 九月, 緦麻는 三月服임)와 복 입음이 없는 거리의 사람에 이르게 되어 기쁜 일에도 축하하지 못하고 상사(喪事)에도 조상치 못하는 지경이 되니 이것이 소씨(蘇氏) 족보가 생겨난 이유라 하겠으며 족보를 보게 됨으로서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나니 이제 우리 인성이 만약 족보가 없다면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또한 어데로 좇아서 생기겠는가?

옛적에 나의 방(傍) 七세조이신 유장(有章) 어른께서 이것으로 병이 되셔서 정부자께서 이른바 일가를 거두어 보계(譜系)를 밝혀야 한다는 일에 정성을 쏟으신 지가 여러 해로서 호남도 가시고 영남도 가셨으며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이북 지방까지 가셔서 여러 집의 조금만 책(片帖) 및 국사를 힘들여 찾아 보셔서 제一회의 보책을 창설(剏設)케 하셨다. 그후 五十九년째가 되는 병술년에는고조부 현국(顯國)님께서 이어서 二회보를 중수(重修)하시었고, 그후 三十九년째가 되는 갑자년에 일가 조부이신 재현(載鉉)씨가 발의하여 三회 수보(修譜)를 하시었으며 그 후 二十八年이 되는 신묘년에 족조부 영하(榮厦)씨와 족형 영철(永哲)씨가 의논을 함께 하고 통문을 내서 四회의 중간(重刊)을 보았던 것이다. 그 후 신묘년(四回譜刊行)으로부터 三十三년이 되는 계해년에 평산일가 월벽(月璧)씨가 발의하였으나 여러 해를 지내도록 그 정성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외람되이 재차 발문(發文)할 때에 참여하였는데 전국의 여러 일가들이 일제히 응해 주어 족조 영태(榮台)씨와 일가 봉식(鳳植), 근식(謹植) 제씨께서는 몸소 함경남도에 가서 강율계(姜栗溪)의 집에 내려오는 ‘제성보첩(諸姓譜牒)’을 참고해 와서 부록하여 이제 하나의 완전한 글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 뜻은 조상을 높임이며 일가에 돈목을 위함이라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또한 저절로 생긴다 함이 과언이 아니로다.

슬프도다! 후진(後進)들은 나의 주장을 몸 받아서 앞의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넉넉하게 도와서 우리 집안의 가성(家聲)을 크게 해 준다면 어찌 다행치 않으랴.

 

 

61세손 면천파 봉식
성씨(姓氏)라는 것은 성(姓)의 나뉨이라 하겠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우리 인씨(印氏)는 본래 주(周)나라의 희성(姬姓)으로서 주선왕(周宣王)이 그의 아우를 정나라 읍(鄭邑)에 봉하였었는데 춘추(春秋)때에 이르러 정목공(鄭穆公)의 증손 자인(子印)의 손자 단(휘 段)이 그의 조부 이름자 ‘印’으로 성씨를 삼으니 이 분은 칠목(七穆)의 한 분으로 정나라에 칠목(七穆)이 있음은 노(魯)나라의 삼환(三桓)이 있음과 같은 것이 다. 인성(印姓)으로 중국에 있는 사람이 얼마인지 알지를 못하고 망연하더니 남송(南宋)이후로는 간략히 들리는 분이 있었으므로 그 말이 인성위씨실록(印姓爲氏實錄) 중에 쓰여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시조(鼻祖) 아찬공(阿餐公)이 신라 유례왕 때에 중국 풍익땅(馮翊)으로부터 우리나라로 오셔서 대대로 벼슬이 서로 이었고, 고려 인종 때에 이르러 초당공(草堂公 : 휘 邠)께서 교수 부원군에 봉해지시니 교수(喬樹)는 곧 교동의 별호인 것이다. 대개 그 시초를 근원하여 지내온 것을 말한다면 정목공(鄭穆公)은 우리의 인성(印姓)이 나오게 된 조상이라 하겠고 공의 손자 단(段)은 성씨를 얻은 시조요, 아찬공(휘 瑞)은 우리나라로 나온 후의 시조이시며, 초당공(휘 邠)은 본관을 얻은 중시고이시다. 우리나라로 나오시기(東來) 이전은 연대가 더욱 멀고 지역이 떨어지고 달라서 진실로 가히고증할 수 없으나 이후로는 신라 때에 대대로 공경(公卿)을 지냈다는 말이 있고, 고려 때에는 장수와 정승이 이어나서 문무(文武)가 아울러 현달하여 드디어 교목세가(喬木世家)가 되었으니 그 공훈과 명예, 덕업(德業)이 국사에 뚜렷하게 되니 마땅히 또한 가승(家乘)에도 전해오는 것이 있었을 것이나, 여러 번 세상의 변천(滄桑)을 지내와서 잃어서 내려오는 것이 없으므로 무자년에 족보를 시작한 이래로부터 병술, 갑자, 신묘년의 네 차례 중수(重修)를 할 때마다 항상 고치게 되었다.

그 삭제한 것의 근엄함과 교정(校正)의 정밀하고 자세함이 마땅히 지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상계(上系)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세대의 누락된 것이 있고, 연대가 착오된 것으로써 문헌으로 증거 할 수 없음을 한탄하시고, 매양 후손이 고증하라는 훈계로써 정녕(丁寧)히 경계하여 고(告)해 놓으신 것이 하나 둘에 그치지 아니하니 이것이선군자(先君子)께서 고심하신 바요, 후손의 근심과 슬픔이었던 것이다. 하나라도 가히 증거할 서적이 있으면 고정(考正)하지 않을 수가 없었음은 오히려 물론이었던 것이다.지금으로 부터 신묘년과 거리가 또 약간의 해가 되는데 상계(上系)만 그러한 게 아니라 후손이 그 뒤에 난 사람들이 혹은 손자까지 안게 되었으나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제五회 족보의 일이 또한 이미 늦었다고 하겠다. 이에 나의 동구세종형(同九世從兄)이신 의관(議官) 동식(東植)씨께서 八十의 높은 나이로 선대의 훌륭함을 계술(繼述)하는데 뜻을 두사 지난 임신년 봄에 족조 영태(榮台)씨와 함께 글을 각도(各道)에 내서 경성(京城)에서 회의를 열매 여러 일가들이 기쁘게 응낙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함경남도의 강씨(姜氏) 집에 고대(古代) 만성보가 있다는 것을 듣고 영태(榮台)씨가 몸소 가서 교수인씨세계(喬樹印氏世系)를 구하여 등본해 가지고 오시었다. 슬프도다. 이 등본이여! 족보를 창간할 때에 나오지 않고 비로소 五회째 수보(修譜)하는 오늘에 나타남은 어쩐 일이냐. 풍성(豊城)의 보검(寶釼)도 드디어 합할 때가 있고 형산(荊山)의 옥덩어리도 채색을 드러낼 날이 있다고 하였으니 물건도 오히려 그렇거늘 이 무슨 괴이함이냐. 사이에 누락되었던 세대(世代)가 저 우리 족보에 비하여 모두 실려져 있고, 착오되었던 연대도 다른 고증을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분명해져서 천년의 전해오지 못한 실마리를 잇게 되었으니 보첩을 완성할 날을 가히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족조 화석(華錫)씨께서 정식(正植)과 함께 소성(蘇城)을 가고, 족형 영식(榮植)씨가 종구(鍾九)와 함께 관서(關西)에 가고 족숙 종화(鍾華)씨가 태성(泰聖)과 함께 호남에 가서 수단(收單)의 도착 안된 것을 수합하였고, 족종(族從) 근식(謹植)은 널리 서적을 찾음으로써 자기의 소임을 삼아 먼저 해온 등본이 혹 차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일부러 함경남도에 가서 원본과 대조해 왔으며 경성(京城)에 가서 서적이 관부(官府)에 있는 것은 관청 허가를 얻어서 열람하고 시장에 있는 것은 자기의 노자로 사서 보매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물론하고 우리 인씨(印氏)와 관계되는 글자는 찾아서 모으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이 수년을 하매 덕산, 면천, 당진 三파의 약간 종재가 또한 잇기가 어렵고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전주의 종씨 창환(昌桓)씨가 보책에 쓰일 종이를 분담하고 기타 경비 부족은 근식(謹植)이가 종제(從弟)인 철식(喆植)과, 종질 장환(章煥)과 함께 분담하였으니 성대하도다. 여러 군자의 성의여. 더욱이 근식(謹植)에 이르러서는 크게 부지런하고 애씀이 있었으니 멀리는 배를 타고 차(車)편으로 육지를 돌았으며 가까이는 깊은 곳은 힘써서 건너고 얕은 곳은 건너 뛰었으니 노잣돈과 교제비의 허다한 여비를 대개 자기가 변통해 썼고 또한 남들이 알아줌도 구하지 않고 묵묵히 수완을 써서 이 일을 마치게 되니 어찌 전중중의 경사와 다행이 아닌가. 가히 한스러움이 되는 바는 족숙 익수(益洙)씨가 유사(有司)의 책임으로 중도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종중의 하나의 불행이며 그의 삼종 홍수(弘洙)씨가 또한 그 책임을 맡아서 마침내 완성을 보게 하니 또한 불행 중 다행이다.

돌아보고 생각건대 봉식(鳳植)은 백에 하나도 쓸모가 없는 몸으로 족히 그 사이에 끼일 수 없으되 오히려 선대를 계승하고 후손을 돕는 것이 훌륭한 것임은 알게 되어 보사(譜事)를 개시한 이래로부터 의논이 있으면 끝에 나아가 참석하고, 갈 곳이 있으면 뒤에 따라가서 소경 말이 방울소리 들음과 같이 하였으므로 비록 능히 선대의 훌륭함을 찬양(贊揚)해 드리지는 못하나 여러 종씨께서 정성을 기울이고 힘을 다함에 그윽이 생각되는 바 있으므로 간략히 그 전말(顚末)을 펴서 우(右)와 같이 이르는 바이다.

 

 

61세손 면천파 근식
생각건대 우리 인씨(印氏)가 춘추때의 공손(公孫)이었던 단(휘 段)께서 성씨를 얻은 이후로부터 성(姓)과 자손이 중국 본토에 살매 마땅히 자손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사람과 땅이 모두 멀어서 자세한 것을 듣지 못하여 진실로 그 대개도 알 수가 없었다. 서진(西晋)의 혜제(惠帝)때에 이르러 우리의 시조 아찬공(휘 瑞)께서 풍익대부로서 신라에 사신을 나오셔서 자손이 대대로 큰 벼슬에 올랐으며, 고려의 시어사공(휘 毅) 이후로부터 이름과 덕이 세상에 빛났고 벼슬이 서로 이어서 서책에서 밝게 빛이 났고, 이조 초엽에 이르러서는 혹 충신으로서 귀양을 가고, 혹은 의리를 지켜서 스스로 조용히 지내고 시골로 은퇴하여 살매 점점 더욱 쇠미(衰微)해져서 지금에 이르렀으니 슬프고 한숨이 나고 탄식되도다.

반고(班固)씨가 이른바 ‘선비는 옛덕을 먹고 산다’한 것이 과연 헛된 말이요, 두자(杜子)가 탄식한 바와 같이 “맑은 가문의 선비도 보통사람(庶人)이 된다”고 한 것이 격언(格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가들이 대개 많이 근검(勤儉)하고 조심하여 지켜서 비록 문벌을 숭상하고 민족을 학대하는 오늘날(당시 日政下)에 있어서도 오히려 능히 천역(賤役)을 면하여 명가(名家)의 후손임을 잃지 않았으니 이 어찌 옛집의 유풍(遺風)이 오히려 남아 있음이 아니냐. 다행히 또 근대에 여러분이 종종 문학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내여 영남 호서에서 선망하게 되었다. 무자보(戊子譜)를 비로소 수십대의 아래에서 간행케 되매 천백년전의 일을 강구(講求)하여, 전해오지 못한 실마리를 잇게 되었으니 그 혹 계세(系世)와 연대가 누락되고, 와전으로 그릇되게 된 것은 진실로 형편이 그러했거니 어찌 괴이함이 있으랴. 이제 제五회 중간(重刊)의 날을 맞아 널리 서적을 모으매 비로소 학사공(휘 邠)께서 우리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을 얻은 시조가 되심을 알게 되니 우리나라의 인씨(印氏)로 교동으로 본을 한 사람은 모두 학사공의 후손인 것이다.

외(瓜瓞)가 넝쿨을 뻗고 버들이 곁가지를 멀리 하여 일찍이 二十三본까지 되었으나 마침내 한 본으로 합하였으니 이것은 천륜의 퍼진 바로서 하늘 이치의 사연이요 인력으로 강합(强合)함이 아닌 것이니 이로 인하여 보건대 처음에 빠지고 와전으로 잘못된 것이 멀지 않아 스스로 고쳐서 쓰이고 그릇된 것이 바로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에서 이후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오. 후일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에서 옛적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어찌 오는 사람들이 지금만 같지 못하랴. 더구나 인쇄 기계가 생겨나서 옛날의 목판각자의 어려움보다 빠르게 되어 옛 서적이 모두 국문으로 번역돼 나와서 여러 사람의 지어냄이 점점 많아져서 적었던 것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고 숨어있던 것이 나타나서 햇볕을 보게 되니 오직 원하건대 여러 종씨들은 지금의 참고한 문헌이 족히 증거된다 하지 말고 아직 부록에 붙혀 두어 후대 의 고찰이 있기를 기대하노니 후에 반드시 다시 명확히 고증하여 기우(杞憂)나 부족의탄식이 없게 할 지어다.(姜本을 말함) 불초가 이 일에 있어 만에 하나도 도움이 있지 않았는데 다만 여러 유사(有司)의 선조를 사모하고 후손에 법을 끼쳐 주려는 정성에 힘입어서 이번의 일을 준공케 되니 이 또한 우리 인씨(印氏)의 일대 경행이라 하겠다.

주역에서 이르기를 “군자는 동류로써 사물을 분별한다”고 한 것은 같은 인류로써 분별해 보면 마침내는 크게 시작됨이 있다는 것이다. 무릇 우리의 족보를 함께하는 사람들은 멀고 가까운 것으로서 사이를 두지 말고, 능히 선조께서 하나같이 자손을 보게 되는 마음을 본받아 마음으로 삼는다면 효도와 공경과 돈목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서 후손들이 보고 감동되어 절로 일어나게 될 것이므로 저절로 막힌 운수는 가고, 창성하여 크게 될 것이다.

 

 

61세손 순창파 정규
지난 신묘년에 수보(修譜 : 즉 四回譜)룰 한 후로부터 三十四년이 되는 갑자년에 평산의 일가어른 월벽(月璧)씨가 족보의 중수(重修)에 뜻을 두어서 경성(京城)에 보소(譜所)를 차려 놓은 지가 五~六년간 이었으나 마침내 일을 준공시키지 못하고 불행히 돌아가셨으니 슬프다 씨의 고심함이여! 흰머리로 七十 나이에 객지의 여관에 꿇어앉아서 준공을 기약하다가 마침내 돌아가시니 누가 슬프고 탄식하지 않으랴. 지난 임신년 봄에 면천, 당진, 덕산의 종중으로부터 중간(重刊)할 것을 합의하고 이에 통문을 전국에 내매 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에 보소(譜所)를 면천면 죽동리에 정하였다가 이해 겨울에 유사(有司) 영태(榮台)씨 댁으로 옮겼으니 이는 그 수고를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듬해 계유년 四월에 내가 일부러 덕산에 가서 자세히 전말(顚末)을 들어보니 아득하여 펴 나갈 전망이 없으므로 곧 영태(榮台)씨와 함께 면천, 당진을 찾아가서 두루 여러 종씨를 찾고 선후책(善後策)을 묻게 되었다. 석문연 통정리에 이르러 익수(益洙)씨를 찾으매 일견 의사가 맞게 되었고 쾌히 족보일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하시므로 동년 十一월에 경성의 현국(鉉國)씨 집에서 크게 종회(宗會)를 열었는데 여러 의논의 일치로 유사(有司)를 익수(益洙)씨로 개선(改選)하여서 힘써 추진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우연히 병으로 입원케 되어 一년여를 치료하다가 익수씨가 또한 불행케 되니 어찌 그 애석함을 이기랴. 이에 승수(勝洙), 근식(謹植), 철식(喆植), 장환(章煥)의 여러 종씨가 의(義)를 중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해서 힘을 합하여 성취를 도모하매 약간의 해가 지나서 완성을 고하게 되었다.

슬프도다! 우리의 씨족이 흩어져 산지가 오래였으되 비로소 전주와 당진에서 무성함이 끝나지 않은 기상을 보겠도다. 더구나 봉식(鳳植), 근식(謹植)의 두 분께서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고 널리 옛 사적을 찾으매 세 번이나 북관(北關)에 가서 강씨네 집의 만성보를 얻어 보았으며 두 번이나 경성(京城)에 가서 고려 신라의 역사를 모두 열람하였고, 한 번 송도(松都 : 개성)에 가서 개성파보의 선계(先系)를 참고해 와서 선현의 개발치 못한 것을 개발하여 무궁히 전하게 하였으니 그 선대를 계승하고 후손을 넉넉히 함에 공로가 이보다 더 큼이 없도다. 나같이 학식이 소경이요 글을 못함으로써 족히 그 뜻을 모두 이루지 못하나 대략 듣고 본 것의 미치는 바를 써서 적은 정성을 표하여 이르는 바이다.

 

 

60세손 덕산파 현국
족보라는 것은 성씨의 일가들을 기록하여 그 류(類)를 합하고, 계통과 서열을 밝혀서 돈목을 두텁게 함이니, 이에서 친한 이를 더욱 친케하는 뜻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낳는 것이 모두 천지의 조화로 이루어지매, 천하의 머리가 둥글고 발꿈치가 모난 것들이 우리의 류(類)가 아님이 없으나 홀로 성씨의 일가만을 취하여 서로 사랑하고자 함이 또한 적은 일이 아니지 않는가. 대개 군자(君子)의 도(道)는 근본이 있고 끝이 있으니 친해야 할 것을 친함으로부터 나아가서 백성에게 어질게 하고, 백성에게 어질게 함으로부터 물건을 사랑케 되어서 급기야(及其也)는 육합(六合)이 한 집안을 이루고 만성(萬姓)이 동포(同胞)가 되나니 비유(譬喩)컨대 먼 길은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되고 높은 곳을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실로 능히 이를 안다면 족보를 만드는 의의가 또한 과반(過半)은 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 인씨(인씨)가 원래 중국에서 나왔는데 정나라의 공족(公族)인 인단(印段)으로 시조를 삼아서 계승해 내려오더니, 진(晋)나라 혜제 때에 서(휘 瑞)께서 신라로 사신을 오셨다가 왕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서 아찬 벼슬을 삼아 드디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어 대대로 큰 벼슬에 오르다가 고려때 초당공(휘 邠)과 석성 부원군(휘 璫)에 이르러서 혹은 문장가로서 나타나시고, 혹은 절개와 옳음(義)으로써 위대한 행적과 훌륭한 자취가 역사책에 빛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으나 그 자손이 많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족보를 편찬하여 일가를 합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제 그 거리가 수십 년이 되었으나 이어서 다시 할 겨를이 없었으매 가지가 나뉘고 파(派)가 멀어져서 드디어 길거리의 남과 같이 되어가니 어찌 돈목의 정의(情誼)라 하겠는가? 지난번에 종중에서 의논들이 크게 일어나 족보편집을 시작하여 여러 해가 지나서 공을 끝마치게 되니 이로써옛날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합하여 근심을 가히 함께 근심하고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하게 되었으매 근원을 거슬러 가서 그 덕을 상고해 보고 또한 가히 효도와 공경을 무궁한데 까지 권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우리 집안의 큰 다행이라 하겠다. 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그 숫자가 만천에 이르나니 이 만천의 사람들이 능히 선조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먹어서 근심과 기쁨을 함께하면 한 사람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천하의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요, 또 이 몇 사람들이 친친(親親)의 길로 미루어서 백성에게 어질고 물건을 사랑한다면 거의 투쟁과 서로 빼앗음이 없어져 천하가 흥왕하고 천하와 함께 그 즐거움을 함께 하리니 이 어찌 대학(大學) 책에 이르기를 “집안을 가지런히 한 후에 천하가 평탄케 된다”고 함이 아니냐. 우리의 인성(印姓)이 된 사람들은 다만 그 일가를 합함에 그치지 말고 또한 그 마음을 합하고 근본에 힘써서 도의를 밝힌다면 만성(萬姓)들이 비로소 본 받게 될 것이니 이 어찌 한 집안의 경사에 그치리오. 장차 천하의 풍화(風化)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나같이 재주가 없고 세속 일에 골몰하여 적은 수고는 조금도 보탬이 없었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한지 모르겠다. 이에 주제넘고 고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두어 줄을 적어서 작은 정성에 찬동하는 성의를 표하는 바이다.

 

 

63세손 송도파 수창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印氏)의 성을 얻음이 춘추책에 실려 있으니, 정목공의 증손 七목의 하나이신 인단(印段)이 이 분이시고 서진(西晉)에 이르러서 풍익대부로서 사신으로 신라에 나오매 아찬에 배(拜)하신 서(휘瑞)께서 곧 우리나라 인씨(印氏)시조이시다. 그러나 중간의 수백 년간에 여러 번 난리를 지나오매 문헌으로 증거 할 수가 없어서 상계(上系)가 자세치 않게 되니 그 자손이 된 자가 어찌 통한이 되지 않겠느냐.

고려의 학사공(휘 邠)과 석성 부원군(휘 璫)이하로부터는 덕업(德業)과 문장을 훌륭히 가히 고증케 되었는데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길에 올라서 공경(公卿)을 지내다가 중엽에 이르러서 파(派)가 나뉘어 오래되고 자손들이 팔방에 흩어져 살매 혹은 볕을 향한 꽃이 있는가 하면 혹은 물을 건넌 귤과 같음이 없지 않았었다. 지난 기미보 간행에 있어서는 오직 개성파만 홀로 파보를 하고 말았는데 고종 신묘보(辛卯譜)의 간행에 이르러서는 면천파 일가 영철(永哲)씨가 비로소 보첩속간의 의논을 주창하여 영기(永璣), 종화(鍾和), 관수(寬洙), 용식(容植), 도석(道錫), 홍식(弘植), 익수(益洙), 용수(龍洙) 제씨를 각도에 파견해서 수단(收單)케 하여 인쇄에 붙이매 수개월이 지나서 준공을 고하였으니 이 어찌 영철씨의 선조를 받들어 효도를 생각하고 고심과 열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그때에 내가(宗下) 약관(弱冠)의 나이로 개성파의 수다만 해서 보소에 드리고 돌아온지가 어언 四十성상이 지났으니 그때에 일을 보던 여러 일가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다만 슬픔과 탄식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제 또 당진의 근식(謹植), 철식(喆植), 장환(章煥) 세 분이 성금을 내서 인쇄의 모든 비용을 전담하고 전주의 창환(昌桓)씨가 보책용지를 분담하였으니 그 선조를 사모하고 후손을 도우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義)를 중히 하는 정성이 지금 사람의 감탄이 되도다. 나는 늙고 또 병들어서 비록 가서 사례치는 못하나 그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하고 일가를 합하는 일에 어찌 우러나오는 마음이 없겠는가. 주역에 “사람은 일가와 함께 해야 한다”하였고(同人于宗) 서전에 “구족과 친해야(以親九族) 한다”하였고 시전에 “너희 조상을 잊지 말라(母念爾祖)”하였으니 실로 우리의 일가가 족보를 함께하는 오늘에 부응하는 말이로다. 이로부터 우리의 동종(同宗)들은 각자가 힘쓰고 장려하여 먼 사람은 가까이 지내고 소원했던 사람은 친하게 지내서 거리의 남과 같이 하지 말지어다.

 

 

62세손 토산파 영보
무릇 사람의 족보가 있음은 근본을 미루어 보고, 일가에 돈독하려는 것이니 표범과 수달피도 근본을 알고 풀과 나무도 뿌리로 돌아간다 하니 비록 물건의 적은 것들도 한결같이 스스로 우러남이 같아서 이와 같은데 더구나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우리의 사람이랴 슬프다! 우리 시조께서 동으로 건너오신 이후로부터 신라와 고려에 벼슬하사 큰 벼슬이 이었었고, 봉군(封君)과 벼슬을 세습하여 대대로 사람이 다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뚜렷하였는데 이조(李朝)에 이르러 집안 운수가 잠시 미약하여 성(姓)이번창치 못하고 쓰러져서 퍼지지 못했다. 팔방에 흩어져 살매 사람과 글이 모두 움츠러들었으나 전조(前朝)의 큰 벼슬을 한 후예로서 인성(印姓)을 놓고 사랑하는 뜻에 어둡다면 어찌 조상에 욕이 되고 조롱거리가 됨을 면하겠는가. 먼저 번의 통보(通譜 : 즉 大同譜)가 기록이 호번하고 질수(帙數)가 적어서 일가에 족보를 모시고 집안에 가승(家乘)이 있는 사람이 백에 두세 집 밖에 안 되었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종법(宗法)이 무너지면 사람이 온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냐. 이로써 근심하여 귀하신 일가 여러 선배께서 궐기하여 수단(收單)도 하고 편집도 해서 위로 근본이 되는 근원과 곧은 줄기로부터 아래로 파(派)의 흐름과 곁가지까지 갖추어 싣지 않음이 없어서 후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환하게 이해케 해 놨으니 여러분의 공로가 어찌 얕고 적다하겠는가. 슬프다! 사람이 능히 초목과 금수의 이름은 알고 있되 선조의 이름자에 이르러서는 막연히 모른다면 이는 사물에는 후하고 선조에게는 박한 것으로서 이것은 사물은 늘 눈으로 보고 선조 는 보첩을 보지 못한 연유인 것이니 지금의 보첩은 마땅히 집집마다 받들어서 지키고 사람마다 연구하고 읽으면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서 거의 근본을 미루어 일가에 돈목하는 뜻에 위배되지 않고 이에 조상께서 후손에게 두터운 덕을 끼쳐 주신 것이 빛이 무궁하게 흐르리로다.

 

 

62세손 평산파 현
탄식하도다!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신 단(휘段)과 동래시조이신 아찬공(휘瑞)과 득관 중조이신 초당공(휘 邠)의 사적이 우리나라의 서적에 실려있으니 오늘의 족보를 함께 한 모든 일가들이 뉘가 세 할아버지의 자손이 아니겠는가? 주관(周官)의 장방국지(掌邦國誌)에 이르기를 “세계(世系)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케 해야 한다”고 하였고 하남(河南)의 정부자(程夫子)의 교훈에도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해야 한다“하였고 미산 소노천(嵋山蘇老泉)의 서문에도 이르기를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서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옛날에도 이와 같이 하였는데 지금 일이 아니라 해서 이제 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인씨(印氏)의 족보는 인씨(印氏)의 일가를 족보함인 것이다.

인씨(印氏)가 정나라에서 나와서 신라로 옮겼고, 고려로 전해 왔는데 전세(前世)의 성대한 자손으로서 근래에 침체를 이루었으니 이 또한 어지러우면 태평케 되고 빼앗긴 것은 회복되며 통하고 막힘이 왕래하는 운수인 것이니 한탄해야 어쩌리오. 침체한 뿌리를 북돋아 기르는 것과 같음이 없으니 북돋아 기르는 길은 어디에 있겠는가? 이에 면천, 당진, 덕산의 여러 일가들이 불원천리하고 강선생의 집에 가서 세계(世系)를 구해 와서 전열(前烈)을 빛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앞에서 말한바 “세계(世系)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한다”는 뜻에 맞지 않느냐. 발문(跋文) 중에 알린 부족된 경비를 부담하였으니 명하전을 내지 말라고 함은 또한 앞에서 말한 일가를 거두어 풍속을 후하게 한다는 길이 아니랴. 자기파의 파보만을 하려하지 않고 이처럼 대동보 보소를 설치하여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나 앞에서 말한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절로 생긴다 함이 뉘가 이보다 더하리오. 우리 집안의 족보를 창설한 일들 은 이미 병계 윤선생의 서문에 모두 있고 우리의 족보를 이어서 쉽게 자주 한다는 것도 또한 판서 김상공(金相公)의 서문에 쓰여 있으니 나같이 학식이 없고 몽매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한마디를 그 사이에 덧붙이겠는가. 그러나 신묘년의 족보 만든 일을 생각하건대 지금까지 四十六년이나 되었다.

그때에 우리 백부이신 진사공께서 관서(평양 등지) 지방의 별유사(別有任)로서 혹은 사람을 면천면 죽동리로 심부름 보냈고, 혹은 몸소 죽동리에 가셔서 한편의 책임을 맡으셨는데 지금 나의 몸에 이르러서는 노년에 먼 행보가 어려워 능히 석문면 삼화리(譜所)에 가서 보소일의 만분지일도 돕지 못하고 다만 천박한 말로써 앉아서 망녕되고 주제 넘은 죄를 범하게 되니 황공하여 마지않게 된다.

 

 

63세손 덕산파 종황
어느 사람은 이르기를 “옛적에는 족보가 없었어도 구족(九族)이 모두 화목하였고, 백성(黎民)들이 시대가 변해도 화목하였다“고 하니 “무엇 하러 족보를 하려는가?”라고 하니 슬프다! 이것은 그 근본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끝(末)만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생긴 처음부터 씨족이 있지 않음이 없었고, 스스로 역사가 있은 이래(以來)로부터 그 마땅히 기록할 바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하우씨와 순임금이 황제(黃帝)의 팔세손(八世孫)임을 알은 것이니 이로써 보건대 비록 족보의 이름은 없었으나 이미 족보 비슷한 계통만은 있었던 것이다.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려서 화목을 이룬 것이 진실로 그 도(道)가 있은 것이니 후세에서 이 뜻으로 미루어서 족보의 계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또 나무의 잎새는 뿌리를 덮고 벼 머리가 곧게 되면 근본을 돌아다보고 여우는 죽을 때 언덕에 머리하며, 까마귀도 오히려 어미를 먹이는 것(烏之反哺)이 자연에서 나와서 바로잡아 주지 않아도 이루어진 것이니 사람으로서 그 선조를 알지 못하고 그 친족을 알지 못함이 옳은 것이며, 아는 길이 이 족보를 버리고서 어찌 하겠는가. 무자년으로부터 신묘년에 이르기까지 四회나 간행하였는데 지금 또한 四十六년이나 되었다.

족보를 하는 것의 오래되고 가까운 것이 우리 가문과 일가의 성쇠(盛衰)와 관계됨이 있으니 어찌 두렵고 염려가 되지 않겠는가. 이번에 여러 종씨들께서 힘을 합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능히 이 五회보의 일을 완성시켰다. 그 어질고 수고한 바는 이미 훌륭하신 여러분의 서문에 모두 쓰여 있으니 반드시 덧붙여 말할게 없으나 불초가 외람되이 수단의 책임을 맡아서 비록 도와드린 바는 없었으나 또한 침묵만 할 수가 없어서 간략히 사람은 가히 족보가 없으면 안된다는 뜻을 적어서 후손(後昆)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60세손 면천파 홍수
예부터 명가대족(名家大族)에 문벌로서 남보다 높게 알아줌이 산동(山東)의 최씨, 노씨와 포강(浦江)의 정씨(鄭氏)라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집집마다 공훈이 있고 사람마다 명망이 있음이랴. 이것은 온 일가가 합심하여 함께 선대의 법을 지켜 오므로 능히 아름다운 명예를 보존해 와서 한 세상에 모범이 되게 된 것이라 하겠다. 홍수(弘洙)가 이미 희년(稀年 : 七十)이 넘었으나 돌아보건대 견문도 없고 고루함을 면치 못하나 항상 만년이 되어감을 근심하였는데 금번 교동세보중수의 일에 여러 일가들이 외람되이 도유사(都有司)의 명의로 추천하였다.

감히 굳게 사양치 못하고 마음은 비록 겸연쩍었으나 극력으로 직책에 이바지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산동의 최씨, 노씨와 포강의 정(鄭)씨와 같이 하라고 이르노라.

 

 

60세손 덕산파 종화
사람 집안의 보첩은 한 몸의 정맥과 같은 것이니 정맥이 없으면 어찌 그 몸을 보존하랴. 옛적에 잠곡(潛谷) 김상공(金相公)께서 인조 정축년에 사신으로 연경(燕京 : 지금 북경)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서 四十일을 머무르게 되었는데 공사(公事)를 본 후 일없이 한가한 틈에는 행장 속에서 가지고 온 보초(譜草)를 꺼내어서 일일이 정성껏 간음하여 그 소목(昭穆)을 차례로 나누고 그 파계(派系)를 정리하여 드디어 완본(完本)을 이루니 이것이 청풍김씨 족보의 시초가 된 것이다. 옛적의 어진 분은 이렇게 어려운 때(板蕩之時)를 당하여서도 오히려 이와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평화하고 무사한 때랴? 슬프다. 우리 인씨의 족보한 것이 영조 무자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一百六十九년의 오램이 되었다.

신묘년에 이르러 四회째 수보(修譜)하였는데 신묘년에서 지금까지 四十六년째가 되는데 그간에 어린 것이 장성하고 장성한 이가 늙었으며, 늙은이가 세상을 하직하고 집안일을 체념케 되었으므로 세상에 따라 변천되어 점점 옛 얼굴들이 바뀌어져서 만약 다시 한 세대가 지나면 전부가 변해지리니 어찌 지금에 이르러서 족보를 하지 않으랴. 이로써 여러 일가들이 합심하고 힘을 함께 하여 간행할 날이 멀지 않았으니 모두 이 길을 쫓아서 막힘이 없이 이끌어 가서 일만의 자손에 이르기 까지 그치지 않고 힘쓰면 반드시 세상에서 취하여 법을 삼을 것이다. 이로써 서문을 하노라.

 

 

62세손 면천파 봉환
무릇 많은 사람들이 그 형체와 정신은 모두가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이다. 일가에 이르러서도 멀고 가까운 것을 막론하고 함께 그 물려주신 것을 얻어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사랑함은 곧 할아버지를 잊지 않는 바로서 이는 비유컨대 풀과 나무는 가지가 천개요, 잎새가 만개로되 한 뿌리에서 함께 나왔고 자리서는 도리어 그 뿌리를 덮어 주나니 이것이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하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아버지는 알고 할아버지를 모른다면 야만인이라 이를 것이요, 이것은 풀과 나무만도 못한 것이다.

조상을 높이면 일가를 공경하게 되고, 일가를 공경하면 효도와 공경과 돈목의 바람이 이로 인해 일어날 것이요, 만약 근원이 스스로 나온 것과 파계(派系)의 나뉜 것을 알지 못한다면 팔뚝을 치고 지나쳐도 서로 보기를 길거리의 사람과 같이 하리니 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로 쫓아 생기겠느냐. 이러므로 옛사람들이 보첩을 중요하게 보았던 것이다. 사람에게는 삼십년이 한 세대가 되나니, 그간에 나고 죽은 이가 많게 되어 우리 인씨(印氏)의 족보 있음이 실로 영조 무자년으로부터 비로소 창간 합보 하였고, 후에 병술, 갑자, 신묘년에 이르러서 차례로 거듭 간행하였는데 지금으로부터 사십육년이 되매 다시 중수(重修)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멀고 가까운 일가들이 고심과 피끓는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한마음으로 힘을 내서 발간케 되니 어찌 공경과 사모치 않으랴. 오직 원하노니 오는 후손은 지금으로 쫓아 옛에 의하여 족보의 법을 잃지 않는다면 어찌 경사와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간략히 서문하는 바이다.

 

 

61세손 면천파 경식
사람이 나서 성씨(姓氏)가 있으면 반드시 일가가 있고, 일가가 있으면 반드시 족보가 있나니 족보라 함은 선조를 추모하고 일가에 돈목하며 후손을 돕는 뜻인 것이다. 그러나 조상도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니 이것이 없으면 증거할 수가 없으며 일가에도 친하고 소원함이 있으니 이것이 없다면 분간치 못하고 후손에도 또한 소목(昭穆 : 항렬)이 있으니 이것이 없으면 차례, 즉 질서가 없게 된다. 이러므로 범문정공(范文正公)이 말하기를 “일가가 비록 많으나 우리 할아버지가 보면은 고루 자기의 자손이라” 하였고, 소노천(蘇老泉)이 말하기를 “친함이 다하면 길거리의 사람같이 된다”고 하였으니 족보를 만들게 된 것이 대개 이로 인한 것이다. 비록 조상이 오래되고 일가가 번성하며 자손이 연해 왔어도 이것을 보면 거울을 잡고 만물을 비춰 봄과 같이 눈에 환히 들어오게 되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냐.

섧도다(於戱) 우리 인씨(印氏)가 춘추 때 정목공의 증손 단(段)께서 비로소 성(姓)을 얻었고 진(晋)나라 혜제 때에 이르러 풍익공 서(휘瑞)께서 사신을 신라로 나오시매 신라 왕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 아찬 벼슬을 삼으니 이 분이 동래 시조가 되시며, 고려 인종 때에 이르러 교수부원군 이신 빈(휘 邠)께서 본관을 얻은 중시조가 되시니 조상의 근원이 멀다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일가의 파(派)가 나뉨이 많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헤아려 보건대 후손의 더욱 멀어짐이 또한 어떠하겠으며 문헌의 고증이 없다면 가능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족보의 四회나 이어서 편찬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四十여년이 되었으되 오히려 지연만 되어 왔으니 누가 슬퍼하지 않으랴. 지난 번에 경향의 여러 종씨께서 가끔 족보를 다시 하자는 통문이 있었으나 뜻을 품고 이루지 못한 지가 또한 여러 해 였었다. 슬프도다! 불초의 九세조이신 통정공(휘弘憲)께서 옛 고향 면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오셔서(즉 石門面) 사셨는데 지금에 이르러 후손들이 백여 호가 되었다.

물을 건넌 귤이 다행히 뿌리 내림을 얻어서 한마을의 일가(花樹)를 만들었으니 선대의 아름다움이 미친 바로서 올 봄에 이르러 동七世 종형 근식(謹植)씨가 종중 의논을 모아 보소를 그의 당질 장환(章煥)의 집에 설치하고 큰일의 성취를 도모할새 맨 먼저 는 종재(宗財)로써 충당하였고 이어서는 전주 일가 어른 창환(昌桓)씨가 보책 용지를 부담하였으며 나머지는 철식(謹植), 장환(章煥)과 함께 모두 분담하여 몇 개월이 지나 준공을 고하게 되었으니 아름답도다. 이 족보를 보는 이는 선조를 사모하고 일가에 화목하며 후손을 넉넉히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서 마지않을 것이다.

 

 

63세손 덕산파 장열
우리 시조(鼻祖) 아찬공(휘瑞)께서 서진(西晋)의 혜제때 풍익대부로서 사신으로 신라에 나오셔서 살으시매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에 올랐고, 고려 인종때에 이르러 초당공(휘邠)께서 교수부원군에 봉해졌으니 교수(喬樹)는 곧 교동의 별호이다. 정목공(鄭穆公)은 우리 인성(印姓)의 처음 조상이시며 아찬공(휘瑞)께서는 동래(東來) 시조요, 초당공(휘邠)은 본관을 얻은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 세상에 성대한 족벌이 되어서 국사에 빛나고 절개와 문장이 바둑알처럼 이었었으니 얼마나 번성하였었던가.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또한 익사위성공신(翼社衛聖功臣)이 있었고 만근이래로 비록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문관과 음사(蔭仕)와 무과(武科)의 세 가지 양반(兩班)이 사이마다 났고 충효열(忠孝烈)의 삼강(三綱)이 아울러 났으니 어찌 중국으로부터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긴 것이 아니냐. 무릇 족보의 근원이 어찌 다만 조상을 숭배하고 일가와 돈목함만 뜻하랴. 옛사람들은 일가에 돈목함으로써 천하를 감화(感化)케 하는 근본을 삼았나니 일가와 돈목함은 한 집안만의 일인데 어찌 천하(天下)를 감화하랴 하지마는 이것은 사람사람이 모두 능히 일가에 돈목한다면 온 세상이 모두 그렇게 되어서 세상이 배록 크고 넓으나 어찌 감화되지 않음이 있으랴. 일가에 돈목(敦睦)코져 하면 이에 족보를 해야 하고, 족보를 하고져 하면 그 일가를 거두고 합하는 것보다 더함이 없으니 친하게 지내서 그 덕을 기르고, 근원을 찾아 그 정의(情誼)를 논하여 모두 그 마음에 한 할아버지요, 한 성(姓)이라는 근본을 생각한다면 어찌 두터워지는데 이르지 않으랴.

우리 인씨(印氏)의 족보가 있게 됨이 실로 영조 무자년으로부터 비로소 발간하여 합보하였고, 그 후 병술, 갑자, 신묘년에 이르러 차례로 거듭 간행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四十六년 째가 되니 다시 족보를 닦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원근의 같은 일가들이 모두 이의가 없어서 한마음으로 힘써서 발행의 일을 끝내게 되었다. 오직 자손들이 번창하고 가세(家勢)가 더욱 창성하여 이름이 온 세상에 들리게 된다면 세상에서 반드시 취하여 모범을 삼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서문하는 바이다.

 

 

59세손 덕산파 희배
무릇 족보라는 것은 집안의 역사이다. 나라는 역사가 있은 뒤라야 임금의 다스림과 역대의 평화 및 국난을 알 수가 있고, 집안에는 족보가 있은 후라야 조상과 일가의 소목(昭穆) 및 세계(世系)의 변천을 알게 되니 감히 족보를 하지 않으랴. 대개 태극(太極)이 만물의 시조가 되고 사람의 시조는 자손의 태극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성(印姓)은 춘추때 단(휘 段)께서 조부의 이름자로써 성(姓)을 삼으매 드디어 성을 얻은 시조가 되셨고 진나라 혜제 때에 이르러 서(휘 瑞)께서 풍익대부로서 신라로 사신을 나오시매 유례왕 조정에서 아찬 벼슬을 삼음으로 인하여 교동의 화개산(華蓋山) 아래 인점포(印岾浦) 위에서 사셔서 자손들이 신라와 고려에서 창성하였으니 인점포(印岾浦)의 땅이름이 어찌 우연히 정해졌겠는가? 후손들이 번성하여 경기, 호서, 호남, 영남, 해서(海西 : 황해도), 관서(關西 : 평안도) 사이에 퍼져서 살게 되매 그 숫자가 천백뿐이 아니나 아찬공(휘 瑞)으로써 시조를 삼은 것은 태극(太極)이 우주 만물의 시조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부자(程夫子)가 말하기를 “세상인심을 다스리고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순후케 함은 족보계통을 밝혀야 한다”고 하였고 소노천(蘇老泉)은 말하기를 “나의 족보를 보는 이는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기리라”하였으니 정부자와 소노천의 두 분의 말씀이 이미 옛 족보의 서문중에 있으니 이제 감히 다시 덧붙이지 않겠다. 범문정공(范文正公)은 말하기를 “나의 오(吳)나라 가운데에 일가들이 많으나 우리 할아버지께서 보신다면 모두 똑같은 자손으로서 진실로 친하고 먼 구분이 없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선조의 마음으로써 일가에 미루어 본다면 범문정공의 훈계가 어찌 옛날에만 훌륭한 것이라 하겠는가.

왕원미(王元美)는 족보에 서문 쓰기를 “어진 사람은 적음으로써 나타내려 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적은 것도 나타내려 하고, 어진 사람은 능히 성(姓)을 귀중하게 만들고 성(姓)으로써 귀하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왕원미의 서문은 실로 족보를 위하여 적절히 말한 것이라 하겠다. 우리 인씨(印氏)가 이조에 들어와서 벼슬이 거의 떨치지 못한 것은 생각건대 하늘의 도(道)는 항상이 없어서 무성하고 쇠잔함이 운수가 있는 연고이니 이로써 음이 다하면 양이 생기고 막힘이 지나면 태평이 오는 것은 이치의 그러함인 것이다.

나의 족보를 같이한 여러 일가는 그 덕을 닦고 능히 선조의 훌륭함을 이어 나간다면 어찌 후일에 번성하지 않겠는가. 지난 영조 무자년에 비로소 족보를 창간하였고 그 후 병술, 갑자, 신묘년에 계속 중간(重刊)하였었는데 이번의 병자년에는 다행히 종중 여러 군자의 족보 닦는 뜻에 힘입어 인쇄에 들어가게 되어서 조상을 높이고 일가에 공경하며 일가를 거두어 계통을 밝히게 되었으니 우리 인씨(印氏)의 경사로다. 이 일을 성취한 후로부터는 여러 군자들은 九족을 친하게 하는 마음으로써 몸을 닦고 집안에서 행하며 한걸음 나아가 나라 일에 까지 나아간다면 옛의 종법(宗法)과 다스리는 법이 서로 표리(表裏)가 도리니 어찌 지금 우리의 종법에 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불초를 생각건대 또한 글도 못하니 어찌 감히 한 말씀을 보태랴마는 이같이 중대한 종사(宗事)에 침묵할 수가 없기로 삼가 적은 정성을 표하여 이르는 바이다.

 

 

60세손 면천파 응수
아름다운 옥거울을 잡고 비추어 보면, 만물의 곱고 거친 그 모습이 도망치지 않고 저울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일백 물건의 가볍고 무거운 것이 밝게 눈에 들어오며 보첩을 열어서 상고해 보면 일만 가닥(萬派)의 멀고 가까운 것이 상세히 알 수 있나니 그러면 일가에서 가히 없을 수 없는 것은 족보인 것이다. 여러 대의 조상 묘소가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여 소와 양떼가 밟아서 언덕과 구덩이가 되어 뼈가 들어나도 알지를 못하고 일가친척(一家親戚)이 가까운 데로부터 멀어져 친함이 다하여(自功緦至袒免親盡) 마침내 길거리의 사람으로 돌아가도 분별치 못한다면 그 허물이 어디에 있느냐. 실로 이것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니 어찌 이마에 땀이 나고 또 개탄(慨歎)치 않으랴. 이러므로 족보의 뜻은 선조를 사모하고 일가에 돈목함이 일대 지침인 것이다. 비록 그러나 족보의 일이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 그 허물이 또한 재력을 마련치 못함에 있어서 중도에 그만 두게 됨이 더러 있으니 탄식할 일이로다. 오직 다행은 이번에 본파(本派)로부터 이에 마음을 집중하여 특히 종전(宗錢)으로써 보충하고 본파의 근식(謹植), 철식(喆植), 장환(章煥) 씨가 또한 많은 금액으로써 힘을 아울러서 찬조(義捐)하였고, 전주일가 사람 창환(昌桓)씨가 인쇄용 한지(漢紙)를 분담하여 열성으로 도와 주었다.

이에 전국(八域)의 여러 일가들이 성원하지 않음이 없어서 명하전(名下錢 : 즉 收單金)을 축내지 않고 간행을 완성시키매 一년을 넘기지 않게 되니 그 선조를 사모하고 일가에 돈목하는 마음이 어떠하였든 것이냐. 슬프다! 후세 자손들은 이어서 편찬하여 우리의 족보가 막힘이 없게 할 지어다.

 

 

60세손 덕산파 종구
슬프도다! 세대가 멀어져 자손이 성하면, 일가들을 합하고 조상을 숭배함은 족보에 서 중히 여기는 바로서 종법(宗法)이 이에서 밝아지는 것이니 군자(君子)가 계보(系譜)를 밝혀서 일가를 거두고 종법을 세워서 조상을 숭배함이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니냐. 삼가 살펴보건대 정나라 목공(穆公)의 증손에 자인(子印)이 있었는데 그의 조부의 이름자로써 성씨(姓氏)를 삼으니 단(휘段)이 이 분으로서 실로 우리의 득성(得姓) 시조가 되시고, 서진(西晋)의 혜제(惠帝) 때에 이르러 서(휘 瑞)께서 사신을 신라로 나오매 교동백(喬桐伯)에 봉함을 받았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여 훌륭함을 이어가매(趾美承緖) 이름난 공경(公卿)이 신라 고려의 두 조정에서 나타나셨으나 세대가 더욱 멀어지고 난리가 혹심하여 문헌상으로 증거할 수가 없고 보첩(譜牒)이 전해오지 못했는데, 영조(英祖) 무자년에 있어서 비로소 족보를 간행케 됨에 병계(屛溪, 별호) 윤선생께서 서문을 지어 찬양하시었고 그 후 병술, 갑자, 신묘년에 계속하여 족보를 다시 하였다. 근래 계유년 봄에 각파의 여러 종씨께서 장씨(張氏)네의 가까운 친족이 함께 삶을 감동하고 위씨(韋氏) 집의 일가들이 함께 사는 것을 사모하여 구보(舊譜)에 이어서 다시 간행하자는 의논을 주창(主唱)하여 글을 띄워서 일가들을 경성(京城)에 모으고 인씨대종회(印氏大宗會)라 하니 의당한 마음을 모두 가졌으므로 토론하매 모두 의사를 함께 하였다.

오직 다행인 것은 불초 종구(鍾九)가 아버님의 말씀을 받들어 종회에 참석하였다가 그때에 도서관에 들어가서 선조의 세계(世系)를 열람하였고, 그해 十월 겨울에 보소(譜所)에서 덕산일가 종화(鍾華), 태성(泰聖)을 남한 지방에 파견하여 두루 알려서 수단(收單)케 하였고, 종구(鍾九)도 또한 면천의 영식(榮植)과 파주의 병하(炳夏) 두 분과 함께 동행하여 대종회에 불참한 북한의 각파에 두루 알리매 모두 호응하여 크게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금년 봄에 우연히 몸이 병에 얽매여서 능히 대동보소의 일에 참여치 못하였으니 조상을 숭배하고 일가를 공경하는 정성이 깊지 못하여서 그러한 것이냐. 의원을 맞아 약을 쓰는 정성이 가벼워서 그러한 것이냐, 시하(侍下)의 몸으로 마음이 주야로 민망함이 절박하도다. 다만 바라고 축원하는 것은 족보 일이 완성케 되는 일 뿐이다. 생각건대 우리의 각파(各派)가 전국에 퍼져 살매 능히 독실히 문학을 다스리고 효도와 공손함에 성실하며 부지런히 스스로 닦아서 그 마을과 고장에서 칭송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두가 선조의 남겨주신 가풍(家風)과 교화(敎化)가 아직도 없어지지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옛 말에 있기를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길고 뿌리가 잘되 있으면 가지가 창달한다.“고 하더니 지금 이번의 족보에서 이를 증험케 되도다.

또한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절로 생김이 한갓 소노천(蘇老泉)의 족보를 하는 본 뜻에 맞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 일가의 일대 경사가 되는 것이니 가히 한 말씀이 없을 수가 없으므로 감히 고루함을 잊고 간략히 전말(顚末)을 적어서 끝에 붙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