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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사 상량문
면천의 북쪽 당진의 남쪽 사이에 들어와서 옛부터 신선이 살던 곳이 있으니 아미산의 봉우리가 우뚝이 동쪽에 솟아 있어 큰 자리의 진산이 되었고 승전대의 겹쳐있는 석벽이 소반처럼 꾸부정하게 서쪽으로 돌아 동구 밖의 자물쇠가 되었네. 타불산의 웅장한 봉우리가 남쪽(朱雀)에 펼쳐 있고 보령산의 깎아지른 산줄기가 북쪽(玄武)에 그 위용을 떨쳤도다.

이로써 보건대 신령스런 이곳에 터전 생김이 보통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복 있는 사람이 이곳을 얻음도 또한 심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교동의 인성이 이곳에 와서 살매 자손의 번성함이 이제는 대성이라 이루누나. 옛 이름은 닭골(鷄洞)이요 이제는 대골(竹洞)이라 하나니 땅은 기름지고 재물은 풍성하여 자급자족할만 하고 풍속은 순박하고 인물 남이 훌륭하여 외모도 법도가 있구나, 가통을 이어오매 지나온 햇수가 이미 오래가 되었도다. 비록 높은 행적이나 절의(節義)가 우뚝한 분은 적다 하나 오히려 효도와 우애와 예절만은 자랑할 만하여라.
옛적 고려 공민왕때에 석성부원군에 봉함을 받은 이가 있으니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문무의 높은 자리를 두루 역임하셨고 임금의 두텁고 깊은 은총을 입어 첨의평리사사에 임명되시었다. 왕명을 받아 원나라를 치셨으나 무고히 힐책을 받아 화를 입으셨으나 몸 바쳐 다한 그 충성을 천지를 위 아래로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도다. 오직 공의 후손이 그 숫자가 많지 않아서 천지가 여러 번 변천하매 성스런 묘소를 실전하였도다. 이에 모시고 받들 곳이 없어 매양 근본을 찾고 추모할 수 없음을 못내 한탄하였도다. 이로써 전국으로부터 여러 일가와 두루 상의하여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걷고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우렸네.

시작한 지 한해가 넘으매 이제야 겨우 나타내 이루었음은 또한 운수에 의한 일인 것이로다. 비록 이 일이 보통 일이라 이르나 가히 마음속의 깊게 쌓인 정성을 모두 바친 것이로다. 엎드려 생각컨데 높으신 영혼이시여! 만약 위에 계시오면 내려오셔서 훈훈한 향내음에 응해 주시고 아래에 계시오면 술잔을 흠향해 주소서.

비옵나니 아랑위-동쪽 대들보로는 아미산의 우뚝 솟은 태양이 붉고도 찬란하며 하늘에 가득한 맑은 기운이 이곳에 서리어 충신과 효자가 서로 전하여 길이 끊이지 말지며, 아랑위-서쪽 대들보로는 승전대어귀(즉 동구밖)에는 맑은 시내가 둘러져 있어서 아늑한 이곳에 이르러 신선세계가 펼쳐져 있으매 화목한 마음이 한결같이 가지런케 할지며, 아랑위-남쪽 대들보로는 타불산 머리에 청조한 내음이 서려서 이곳으로 문명의 기운이 비춰져서 옛 예절이 만세에 빛나게 이를지며, 아랑위-북쪽 대들보로는 보령산의 솟은 봉우리가 하늘 끝까지 떠 받친 듯하매 기원하노니 서로 서로 가풍을 말로 전하여 절개와 아름다운 이름이 온 나라에 으뜸케 할지며, 아랑위-대들보 위로는 서광이 엉켜서 태평함을 짓게 하매 마음을 합하여 큰 공을 이루어 끼치신 음덕이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음을 알게 할지며, 아랑위-대들보 아래로는 서로 다름이 없고 한가함이 많아져서 참맛의 은근함이 다른 곳에 있지 않으매 밤에는 돌아와서 글을 읽고 아침에는 들에 나가 밭갈이 하게 하옵소서.

엎드려 기원하노니 상량한 후에는 재난과 질병의 액운이 없어지고 좋은 일과 복록의 아름다움만 이르러서 점점 상서스러움만 더하고 인물이 많이 나서 일가를 빛내는 무성함을 얻게 하여 억천만년이 지나도 단청이 오히려 새롭고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제사 올림이 융성하여 위로는 조상의 끼치신 가풍을 잃지 않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공경하는 마음이 끝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서기 一九七九년 기미 八月十七일(양十월七일)
서산시 박종화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