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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TV사극「開國(개국)」抄(초)

一九八三年二月十三日(曜日=舊正) 開國드라마第六回篇이 放映되었는데 「西北面兵馬使碩城府院君印璫」이라는 字幕이 나오고 해설에서『고려에서는 손꼽히는 무예와 용맹을 지닌 이 사람은 교동인씨시조』라고 소개하다. 이 드라마의 原作者는 李台元이며 諮問에는 金基雄, 金東旭, 金正基 등이다.

一九八三年二月十三日 開國第六回篇
서기一三五六年 공민왕 五년 : 이때 援軍으로 元나라 內亂(즉 張士誠 朱元璋 등의 叛亂)에 참전했던 고려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접한 공민왕은 元의 虛實은 이로써 이미 파악되었으니 雙城 등의 失地回復은 이 기회를 놓치고는 다시 없고 回征해 오는 大軍이 일단 開京에 이르면 北으로 다시 움직이기는 어려우니 귀환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는 즉시 연락을 하여 각 군단을 예정지역(쌍성과 서북면)으로 진발시키기로 결심하고 명령하기를『평리 印璫은 서북면 병마사를 제수하니 신순, 유홍, 최영을 副使로 삼아 압록강 건너 설치한 元의 八站을 격파하여 저들의 본국과의 연락로를 끊게 하고 柳仁雨는 동북면 병마사에 제수하니 쌍성을 공략하라』고 한 후 친원파 기철을 목 베인다. 이때 火焰에 쌓이는 쌍성과 함께 압록강의 황량한 兵營이 放映되다.

一九八三年二月二十日 開國第七回「동트는새벽」篇
석성부원군께서는 항상 元軍 수천명이 주둔해 있는 元의 관문인 파사부의 세 기지(三站)를 빠른 속도로 일거에 격파하여 온 조정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즉 이것은 印璫의 軍略과 최영의 용맹이 얻은 결과라고 하였다. 이때 이자춘은 말하기를『印璫은 전략 못지않게 忠義의 인물이니 난이 평정되는대로 아들 이성계에게 印璫을 만나게 주선하겠다』고 부자간에 대화케 된다. 그리고 인당은 유인우를 도와 助戰軍을 이끌고 쌍성수복에 협공(挾攻)케 되었는데 성(城)을 격파한 후 인당은 유인우와 함께 통쾌하여 담소(談笑)하는 장면과 대사가 나온다. 이 쌍성일대는 고려 고종 이후 九九년만에 수복된 것이다. 파사부를 격파한 이 戰功으로 석성부원군은 참지정사(從二品)에 승진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고 副使 최영은 동북면체복사에 임명되어 압록강 兵營에 남게 된다. 이때 석성부원군께서 내직인 참지정사로 승진해 옴을 보고 金鏞은 자기의 위치가 위협을 받을까 염려되어 공민왕에게 시기하는 말을 올린다.

一九八三年二月二十七日 開國第八回篇
공민왕 五년 七월 : 서북면의 압록강 軍陣이 나온다. 이때 실로 괴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元皇帝의 사신 일행이 쌍성이나 파사부의 형편도 모른체 軍陣으로 접근해 와서 오만한 언행으로 일관해 왔다. 이에 석성부원군께서는 절차에 따라 접견검색케 되었는데 이때 元의 사신들이 이에 불복 석성부원군을 해치려 하자 부사 신순이 칼을 뽑아 元의 두 사신을 목베이었던 것이다. 이 소식에 접한 원나라는 내란에 겨를이 없어서 쌍성과 파사부격파 문제는 문제 삼지 않고 오직 원나라 사신을 죽인 것만 고려에 힐책해 오게 된다. 즉 고려에서 옛땅 수복을 떠나 元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 八十만대군으로 응징해 오겠다는 파발에 조정에서는 사태 수습에 대한 어전회의가 열리는데 이 회의장에 석성부원군의 朝服 모습도 등장한다.

一九八三年三月六日 開國第九回篇
조정에서는 사태 수습에 대한 명분논쟁이 분분한 가운데 원의 사신 위왕(공민왕 빙장)이 와서 공민왕과 대좌하여 상담케 되나 협상은 공민왕의 강경책으로 인해 결렬 된다.

一九八三年三月十三日 開國第十回篇
어전회의에서 金鏞은 元과의 화해책으로 고려가 영보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석성부원군께서는『事大도 미덕인가, 지금 되찾은 옛땅을 도로 내주자는 것인가? 정병을 뽑아 서북면을 방어하자』고 극구 주장하였으나 元의 노여움을 달래는 길은 사죄(謝罪)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석성부원군께서는 말하기를『책임운운 이전에 이 한 몸 던져서 나라의 위기를 구할 수 있다면 이 장부의 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스스로 제물이 되실 것을 자원하였다. 처음에는 왕도 극력 만류하였으나 이로써 원나라 사신과 화해의 기틀이 마련케 되었다.

一九八三年三月十三日 開國第十一回「大忠臣」篇
제二차로 온 원나라 사신 일행이 군사 일천오백명의 호위 아래 입국한바 그 앞에서 석성부원군의 참형을 집행케 된다. 私邸에서의 마지막 작별과 대궐에서 순천관에 이르는 十五리 길을 결박 없이 왕명으로 투구 쓰고 갑옷 입고 말을 태워 보낸다. 때는 공민왕 五년 七월 무신일 : 어린 손자 둘이 좇아와 길을 막고 통곡하매 석성부원군은 나무래서 老妻가 이끌고 나간다. 은혜를 입은 한 부녀자가 쫓아와서 중로에서 마지막 술잔을 드린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모습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었다.

- 마지막의 해설대사 -
『元이 파병하지 못하리라 판단했던 왕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대해 국운을 걸고 전쟁이라는 모험에 나서기보다 아까운 한 사람 충의의 무장을 제물로 위기를 모면함은 대륙의 풍세에 항시 一喜一悲했던 고려의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