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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손 덕산파 영국
아아!(於戱) 성씨가 있으면 반드시 족보가 있나니 족보란 근본을 중히 여기고 돈목을 펴는 뜻이라 하겠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종법(宗法)이 서면 사람이 각자 온 곳을 알게 된다” 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일가들을 거두고 풍속을 순후하게 함은 족보의 세계를 밝힘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두 선생의 말씀으로써 본다면 종법(宗法)을 세우고 족보의 계통을 밝혀 그치지 않게 해야 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위로는 선조의 훌륭한 업적을 적어서 높이어 사모하는 정성을 기울이고 다음으론 일가의 분파된 것을 써서 돈목의 정의를 잘 나타내게 하면 비록 백천대(百千代)의 멀기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족보 속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이것이 계승(繼述)하는 정신인 것이다.

우리 인씨가 성씨는 정나라 목공(鄭穆公)의 증손 七형제(七穆) 중의 한 분에게서 나왔고, 서진(西晉) 때에 이르러서 풍익대부(馮翊大夫)로 신라에 사신 나오시매 신라왕이 아찬 벼슬에 임명하고 교동백에 봉하니 이 분이 우리 인씨의 동래후의 시조이시다. 그 후 수백 년간 대대로 큰 벼슬에 오르셨다. 하나 여러 번 난리를 지내오매 문헌으로 써 고증할 수 없으니 통탄과 한이 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러 고려 인종 때에 시어사공(侍御史 : 휘 毅)이 있으시니 이로부터는 세대와 파(派) 및 행적을 빛나게 가히 기록할 수 있으니 유명한 큰 벼슬(名公巨卿) 지내신 분들의 문행(文行)과 무예와 충성(貞忠), 곧은 절개가 있고 이어서(趾美承緖) 천년에 빛나(輝映)신다. 이조에 이르러서는 익대공신으로서 함산군(咸山君 : 휘 元寶)에 봉해진 분이 계시니 이 분이 나에게 十六대조가 되신다. 그 후로는 여러 대에 고을을 사신 분이 계셔서(歷典州郡) 치적이 이미 나타났고, 세업을 잇고 음사로 무과(蔭武)에 오르거나 의(義)를 행하여 끊어짐이 없었으니 신령스런 지초는 근본이 있고 단술샘은 근원이 있다함을 이에서 가히 증험하도다.

슬프다! 나의 증조고(曾王考)님의 맏형과 아우님의 문장, 조부의 지극한 효성, 돌아간 아버님의 실학(實學), 맏형의 아름다운 행적들이 비록 이 고장(鄕黨)의 흠모가 있었으나 불행히도 가운이 비색(不幸門衰祚薄)하여 능히 대를 이어 천명해 드리지 못하니 실로 내가 혈혈단신으로 혼자 남아서(單孑遺孤) 일생토록 눈물이 흐를 뿐이다. 이제 족보를 생각건대 무자년에 시작하였고, 병술년에 다시 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이미 四十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으므로 연대가 좀 사이가 뜨매 씨족도 또한 많아져서 이 때에 이어서 대동보를 하게 되었다. 불초가 학식도 없는데 외람됨과 주제넘음을 잊고 선대를 잇고 후손을 열어 주고져 감히 일가 진사 재현(載鉉)씨 및 영이(榮履), 광수(光洙)씨와 함께 더욱 역사책(史乘)을 찾아서 정성을 기울여 수정하여 인쇄에 붙여서 길이 전하게 하니, 조상을 높이고 일가에 화목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도움이 있으리니 후세 분들은 어찌 이에 더욱 힘쓰지 않으랴.

 

 

60세손 면천파 광수
슬프도다! 우리의 인씨가 대개 정(鄭)나라에서 나왔은 즉, 당시 칠목(七穆 : 七형제)의 한분이라 하면 금지옥엽(金枝玉葉)의 귀한 존재인 것으로서 조상을 주(周)나라와 함께 하였고, 위로 올라 가보면 황제 헌원(軒轅)씨에게까지 이어졌음을 가히 알겠도다. 그 근원(淵源)의 먼 것과 파계(派系)의 번성함이 어찌 장하지 않으냐. 아찬공(阿餐公 : 휘 瑞)께서 우리나라로 나와 살으신 이후 신라에서 저명(著)해졌고 고려에서는 무성히 이루었음은 문헌에서 가히 증거케 되고, 이조에 이르러서는 함산군(咸山君 : 휘 元寶)의 공훈과 업적을 또한 고증케 된다. 그 후로는 후손이 점점 더욱 한미(寒微)해 졌으니 선대를 추모컨대 어찌 마음이 상하고 또 슬프지 않느냐. 선대를 잇고 후손을 돕고, 집안에 화목하여 일가를 거둠이 족보를 하는 일보다 더 큼이 없는 것이다. 지난 병술년의 족보 할 때에 나의 증조부께서 정성을 기울여 일을 주관하사 손때마저 아직 새로운 듯하니 불초 증손자로서는 책을 펴들 때마다 눈물이 나게 되는데 이제 병술년과의간격이 이미 사십년이 되매 족조이신 진사 재현(進士載鉉)씨께서 족보할 것을 발문(跋文)하시매 내가 비록 배움이 없으나 힘을 다해 일을 함께 하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영남. 호남에 가서 여러 일가에게 알려 이번 일을 마쳐 선대의 훌륭하신 빛을 발(發)하게 되었으매 비록 감히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계승(繼述)의 한 가지 일을 해 냈다고 이르노라.

 

 

57세손 천안파 기영
슬프도다! 우리 인씨의 족보가 책에 찍어 세상에 전해온 지가 이제 四十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다. 세대가 좀 뜨게 되매, 가지와 잎새가 또 번성해져서 우리 조상의 자손된 자가 四十년 이전은 비록 기록되었으나 지금의 것은 많이 누락되게 되었으므로 이번 족보의 의론이 면천과 덕산에서 발(發)하여 호남. 호서. 영남까지 호응케 되었다.

생각건대 기영(基榮)이가 학식이 천박(淺薄)하여 족히 선대의 훌륭함을 드러내지(闡揚 못하겠으나 이번 족보의 일이 실로 우리 일가의 다시없는 큰일인지라 몽매함을 무릅쓰고, 피곤함을 잊으면서 보소에 와서 있은 지가 지난 가을로부터 봄철에 이르렀는데,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선조이신 학사공(휘 邠)의 후손인지라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도와서 드디어 소원을 이루니 조상님의 힘써 매섭게 의(義)를 지키신 것이(懋烈) 거듭 빛이 나게 되고, 후손의 소원케 된 것이 모두 기록케 되니 소노천(蘇老泉)의 족보에서 거리의 사람처럼 된다는 훈계에 가히 귀감을 삼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거의 절로 생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