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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城府院君印璫將軍追慕碑文(석성부원군 인당장군 추모비문)
공(公)의 휘는 당(璫)이시며 교동인씨 顯祖이시다. 고려말엽의 중신(重臣)이시자 명장으로 문무를 겸전(兼全)하신 분이었다. 여말(麗末)은 국가의 기틀이 흔들리는 불안했던 시대로서 동북 서북영토는 원(元)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남 밤에는 왜구의 침범이 잦아 백성은 영일(寧日)이 없었다. 원(元)의 책략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는 흐려져 사대주의의 폐풍이 널리 퍼진 이 시대에 공께서는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왕(恭愍王)의 네 조정을 섬기시면서 생애를 통해 자주권 확립과 국방에 신명(身命)을 바치셨다.
일찍이 문과(文料)에 오르셔 충혜왕때 대언(代言 : 즉 이조의 承旨~正三品官) 충목왕一년에 밀직사(密直司 : 從二品)를 지내셨다. 충정왕 三년 八월에는 서북면만호(西北面萬戶)로서 인천근해(仁川近海) 자연도(紫燕島 : 지금 영종도) 삼목도(三木島)에 침입한 왜선(倭船) 백여척을 격퇴시켰으며 수많은 왜구를 생포(生捕)하셨다. 서기一三 五二년 공민왕一년 七월에도 교동도(喬桐島)에서 왜선(倭船)을 나포(拿捕)하시니 왕명으로 동지(東池)에 띄워 널리 관람하게 하고 공에게 동지밀직자사(同知密直司事 : 從二品)를 제수(除授)하는 한편 포왜사(捕倭使)의 중책을 맡기었다. 동왕(同王)三년 六월에는 전라도만호로서 수군(水軍) 一천을 거느리고 왜적을 무찌르셨다. 동월(同月)에 원(元)에서 장사성난(張士誠亂)이 일어나 고려에 파병(派兵) 요청이 있자 조정에서 공을 석성부원군에 장자「안(安)」을 연성군(延城君)에 봉(封)했으며 부자가 제장(諸將)과 더불어 병사 二천을 인솔하고 七월에 원군(援軍)으로 파견될 때 왕은 친히 영빈관(迎賓館)에서 열송(閱送)하였다.
공과 제장(諸將)은 원(元)에 거류중(居留中)인 고려인 二만을 합류시켜 고우성(高郵城) 육합성(六合城)전투에서 치열한 공방(攻防)을 거듭한 끝에 난(亂)을 평정하고 이듬해 五월에 환국하셨다. 동왕(同王)五년 五월에 첨의평리(余議評里 : 從二品官)에 오르시고 六월에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 지금의 일선사령관으로 황주, 평양, 안주, 강계 등지 관할)의 막중한 임무를 띠시고 최영장군 등을 부사(副使)로 삼아 원정길에 오르시어 압록강을 건 너 파사부(婆娑府 : 즉 九連城) 등 삼참(三站)을 격파한 대전과(大戰果)로 민족의 숙원인 고구려 고토(故土)를 수복하였음은 국사에 명기(明記)된바와 같다. 이때 왕을 비롯한 민족자주세력의 과감한 배원정책(排元政策)과 파사부대첩(婆娑府大捷)은 원제(元帝)를 격노케 하여 국경 침입을 추궁하며 八十만 대군으로 고려를 초토화(焦土化)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그해 七월에 공은 참지정사(叅知政事 : 從二品)에 이르신 뒤에도 원(元)의 강압을 무릅쓰고 총병력으로 결사항쟁할 것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왕은 재차 강경한 협박에 못이겨 부득이 서북면 공략의 전 책임을 공에게 돌려 처형한 뒤에 사죄 표찰(標札)을 원사(元使)에게 전하고 화해하였다. 불행히도 고토회복(故土回復)의 대망(大望)은 이로써 수포로 돌아갔으니 원대한 포부와 경륜을 펴지 못하고 여한(餘恨)을 품은 고혼(孤魂)이 어찌 편히 잠드셨으랴. 그러나 공은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멸사구국(滅私救國)하셨으니 그 이름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순국하신 날은 서기一三五六년 공민왕 五년 七월 三十일 무신(戊申)이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절을 기려 개성남문 종경(鍾磬)에 「첨의평리사사인당(僉議評理司事印璫)」이라 새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
공의 배위(配位)인 정부인 해주최씨는 판밀직 안도(安道)의 따님으로 三형제를 두셨으니 첫째 안(安)은 공민왕때 전리판서(典理判書) 연성군(延城君), 둘째는 견(堅)이요, 셋째 해(海)는 우왕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셨다.
공의 遠祖인 東來始祖는 신라 유례왕때 아찬 교동백 諱瑞이시며 득관(得貫)은 고려 인종때 한림학사 교수부원군 문정공(文貞公)이신 휘빈(諱邠)이시고 조상에는 여러 고관현직을 역임한 분들이 계셨다. 顯祖이신 공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대종회에서는 전국 후손들의 단성(丹誠)을 모아 이곳에 사우(祠宇)를 세워 존령(存靈)을 모시고 삼가 비(碑)를 세운다.
西紀一九八一年辛酉四月十二日
碩城府院君 二十一世孫 德山 泰星 謹誌
碩城府院君 二十世孫 溫陽 永宣 謹書
喬桐印氏大宗會 謹立

高麗僉議評理司事碩城府院君印璫將軍追慕碑文(고려 첨의평리사사 석성부원군 인당장군 추모비문)
公은 喬桐人으로 諱는 璫이다. 新羅儒禮王朝의 始祖, 太常博士阿餐(阿飡)公의 四十一世孫이다. 喬桐印氏는 二十一名이 政丞의 班列에 登揚한 羅麗朝의 名門이다. 몇 분의 顯祖를 이른다면 公의 三十九代祖 諱觀은 善行이 後世의 龜鑑이 되어 東國通鑑과 明心寶鑑에 收錄되었다. 八代祖이신 門下侍中 文貞公 喬樹府院君 諱份(一諱邠)은 仁宗때 분으로 學問에 造詣가 깊은 名詩人으로 李齊賢과 李仁老의 文集에 李太白과 蘇東坡의 詩에 못지않다고 稱頌하였다. 公의 六代孫 門下平章事公秀는 大將軍으로 文武를 兼한 重臣으로 元의 皇帝에게 請破屯田上疏文을 올려 元의 珍島屯田設置를 弊止시켰고 請止東征上表文을 올려 元의 日本 三次征伐을 中止시켰다. 碩城府院君은 高麗末葉의 名將으로서 文武를 兼全한 분이었다. 麗末은 國家의 기틀이 不安했던 時代로서 東北, 西北領土는 元의 支配下에 있었고 西南方에는 倭寇의 侵犯이 잦아 百姓은 寧日이 없었다. 元의 策略으로 民族精氣는 흐려져 事大主義의 弊風이 널리 퍼진 이 時代에 公은 忠惠, 忠穆, 忠定, 恭愍王朝의 四代朝廷을 섬기면서 生涯를 通해 自主權確立과 國防에 身命을 바쳤다. 일찍이 文料에 올라 忠惠王때 代言, 忠穆王元年에 密直司를 지냈다. 忠定王三年八月에는 西北面萬戶로서 仁川近海紫燕島 三木島에 侵入한 倭船百餘隻을 擊退시켰으며 수많은 倭寇들을 生捕하였다. 西紀一三五二年恭愍王元年七月에는 喬桐島에서 倭船을 拿捕하여 王命으로 東池에 띄워 널리 觀覽케 하고 公에게 捕倭使의 重責도 맡겼다. 同王三年六月에는 全羅道萬戶로서 水軍一千을 거느리고 倭寇를 무찔렀다. 同月에 元에서 張士誠의 亂이 일어나 派兵要請이 있자 朝廷은 公을 碩城府院君에 長子 安을 延城君에 封하여 父子가 諸將과 더불어 兵士 二千을 引率하고 七月에 援軍으로 派遣될때 王은 親히 迎賓館에서 閱送하였다. 公과 諸將은 元에 居留中인 高麗人二萬을 合流시켜 高郵城, 六合城戰鬪에서 織烈한 攻防을 거듭한 끝에 亂을 平定하고 이듬해 五月에 還國하였다. 恭愍王五年에 同知密直司事가 除授되었다. 五月에 僉議評理司事에 오르고 西北面兵馬使의 莫重한 任務를 띠고 崔瑩將軍等을 副使로 삼아 鴨綠江以西의 八站을 攻擊하여 六月에 婆娑府等 三站을 擊破한 大戰果로 民族의 宿願인 高句麗故土를 回復하였음은 國史에 明記한바와 갈다. 이는 우리 歷史上 渤海以後 最初의 快擧이다. 이때 王을 비롯한 民族自主勢力의 果敢한 排元政策과 婆娑府大 捷은 元帝를 激怒케 하여 國境侵入을 追窮하며 八十萬大軍으로 高麗를 焦土化하겠다고 威脅해 왔다. 그해 七月에 公은 僉知政事에 오른後 元의 强壓을 무릅쓰고 總兵力으로 決死抗戰할 것을 主張하였다.
그러나 王은 再次 强硬한 脅迫에 못 이겨 不得已 西北攻略의 全責任을 公에게 돌려 處 刑한 뒤에 謝罪表文을 元使에게 傳하고 和解하였다. 不幸히도 故土回復의 大望은 水泡로 돌아갔으니 違大한 抱負와 經論을 펴지 못하고 餘恨을 품은 公의 孤魂이 어찌 편히 잠드셨으랴! 그러나 公은 殺身成仁으로 滅私救國하셨으니 그 이름은 靑史에 빛나고 있다. 殉國한 날은 공민왕 五년 서기一三五六年六月三十日丙中이다. 朝廷에서는 公의 忠節을 기려 開城南門鍾磬에「僉議評理司事印璫」이라 새겨 後世에 傳하고 있다. 公의 配位 貞夫人 海州崔氏는 判密直司事安道의 따님으로 三兄弟를 두었으니 長子 安은 恭愍王때 僉議評理와 大提學 典理判書를 지냈고 延成君에 封해졌으며 次子 堅은 文料에 올라 門下贊成事에 三子 海는 禑王때 文料에 올라 吏部侍郞 楊廣道副元帥 密直商議를 거처 兵部尙書와 門下侍中을 지냈다. 麗末에 寶文閣學士와 判密直司事를 지낸 原寶는 公의 孫이니 李太祖가 威化島에서 回軍하여 門下侍中崔瑩을 原州로 流配시키고 原寶는 尙州咸昌에 流配하여 그 곳에서 刑을 받아 他界하였으니 節義를 지킨 高麗의 마지막 重臣이다.
四十一世祖인 公의 忠節과 護國精神을 追慕하기 爲하여 大宗會에서는 全國後孫들의 丹誠을 모아 西紀一九八一年에 이곳에 祠宇를 세워 尊靈을 모시고 六十一世孫 秦星의 謹誌로 碑를 세웠으나 其間 毁損되었으므로 字句를 修正하고 補完하여 大宗會에서 修碣하는 바이다.
西紀二○○一年辛巳 月 日
文學博士 趙仁衡 지음
碩城府院君二十四世孫 浩鎭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