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보(1984) 교동인씨 역사 > 교동인씨 가장록 > 갑자보(1984)
무자보(1768)
병술보(1826)
갑자보(1864)
신묘보(1891)
병자보(1936)
임인보(1962)
갑자보(1984)
 
59세손 천안군수 중배
世事가 無常하여 날로 變遷이 尤甚하온데 惟獨 우리 印姓의 歷史만이 例外일 수 있으리오 壬寅譜를 發刊한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二十有餘年을 經過하여 한 世代를 隔한 感이 없지 않습니다. 譜冊을 펼쳐 閱覽할 때 낯에 익고 눈에 삼삼한 人物이 이미 他界하고 社會奉仕에 활약중인 靑壯年은 幼名 兒名으로 登載되어 壬寅譜는 現實과 맞지 않는 古本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들게 되니 이에 譜冊의 新刊을 바라는 마음 더욱 간절함이 大同譜 重刊 必要性의 하나가 되고 둘째로는 西紀 一九七七年 十二月 喬桐印氏花樹會 創立을 始初로 하여 翌年三月 宗親會로 改編하고 一九七九年一月 大宗會로 改稱하는 等 喬桐印氏 歷史以來 처음으로 全國을 網羅한 宗親 團體가 誕生하여 過去 어느 때보다 氏族間 敦睦의 氣勢가 上昇하였으며 爲先事業實施要望의 외침도 看過할 수 없어 첫 段階 事業으로 碩城府院君을 모신 忠貞祠를 建立하였고 이어 文貞公 墓所 齋室을 新築했을 뿐 아니라 때마침 中央放送局에서 大河드라마 開國을 放映함에 있어 大忠臣 印璫 將軍의 忠節 部門이 온 天地에 放映되자 全國의 宗親은 勿論 族外 一般人들도 印璫 將軍의 壯擧에 새삼 稱頌 追仰하게 됨에 宗親間 敦睦이 一層 加增됨과 同時 譜冊 重刊을 부르짖는 소리 또한 漸次 높아졌으며 세 번째로는 壬寅譜 刊行時는 戰亂直後라 諸般 事情이 如意치 못했던 關係로 漏譜되었던 氏族이 많았던 바 이들도 이제 與件好轉으로 早速 重刊을 渴望하는 等 諸般情勢를 勘案할 때 重刊의 適期로 認定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大宗會 決議로 決行하게 된 것인 바 全 印姓 宗親을 爲하여 慶賀하여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南北이 統一되지 못한 狀況에서 發刊되고 보니 名實相符한 大同譜가 되지 못한 点 甚히 遺憾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今番 發刊한 甲子譜에 있어서는 從前의 辨疑事項으로 後進에게 委任하여 왔던 先世 系代와 一部 派系에 若干 相違되는 点을 姜栗溪 草本을 中心으로 參考하여 修正 編纂되었는 바 언젠가 해야 할 일을 敢行하였다고 보고 今後는 다시 이 問題를 辨疑事項 云云으로 再論을 惹起치 말아야 되겠습니다.

不肖 譜冊 編纂에 一役을 擔當한 바 있으나 健康을 잃은 關係로 所任을 完遂치 못한 点 罪悚스럽게 생각하오며 連日 奮鬪努力하신 實務陣 여러분의 勞苦에 偉業을 새삼 追慕하여 同根同祖의 宗族愛로 相互 敦睦하고 相扶相助하여 倍前의 氏族觀이 솟구치기를 懇切히 비옵니다.

 

 

60세손 현팔
一九六二年 壬寅 大同譜의 發刊에 이어 二十三年 안에 甲子 大同譜를 刊行하게 된 것을 慶賀하여 마지않습니다. 過去에는 大體로 三十年을 週期로 世譜를 編纂하는 것이 通例였으나 急速度의 時代變遷과 아울러 나날이 繁昌하는 宗門의 現況을 收錄하기에는 一世代의 期間은 너무 길어서 未洽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大宗會에서 이러한 實情을 考慮하여 이번 大同譜의 편찬을 앞당긴 것은 매우 合理的이며 適切한 決定이었다고 하겠습니다.

世譜發刊의 意義는 祖上의 行跡을 살펴 바로 알고 敬虔한 精神姿勢로 崇慕의 뜻을 되새기며 遺志를 받들어 宗門의 發展을 期約하는 同時에 無限히 이어질 未來의 後孫들을 위해 물려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時點에서 지난 날의 宗事를 잠시 돌아보면 一九七六年에 發足한 大宗會는 몇가지 劃期的인 事業을 成就하게 되었습니다. 一九八○년 六月에 종문의 宿願이던 忠貞祠의 竣工을 보았고, 一九八三年 四月에는 咸昌 齋室의 落成, 一九八五年 二月의 忠貞祠 齋室 上樑에 이어 世譜刊行 등 이었습니다. 이를 契機로 悠久한 歲月을 두고 면면히 傳承되어 오는 單一血統인 우리 門中은 더욱 合心團結하여 進取的인 氣風을 振作함은 물론 祖上의 遺德을 報答하는데 盡力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번 大同譜 編纂 內容에 대해 特記할 事項은 過去에 考證의 未備로 課題가 되어 있었던 始祖 휘 瑞公의 年代를 典據에 의한 詳考로 中始祖 碩城府院君 諱 璫公에서 三十九代를 遡及하여 그 淵源을 밝혀 記錄하였다는 史實입니다.

끝으로 이 大役事를 推進의 重責을 맡아 始終 온갖 難關을 무릅쓰고 不撤晝夜 獻身的 勞苦를 아끼지 않으신 編纂關係 任員들과 物心兩面으로 協力同參하신 宗親여러분께 深甚한 感謝의 말씀을 드립니다.

 

 

석열
무릇 족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씨족이면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보첩을 만들어서 소목(昭穆)의 차례를 밝히고 각파의 멀고 가까운 것을 분별케 함이니 이러면 비록 백대까지 멀어진 것이라도 접해 보면 같은 뿌리의 친함을 알게 되어서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기고 일가의 돈목을 보존 강화케 되는데 뜻이 있는 것이라, 그러니 족보를 닦는 일이 어찌 중하고도 크다하지 않겠는가?

지금 세상은 인도(人道)가 끊어지고 삼강오륜이 없어져서 자기 본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드물게 되었는데 더구나 서양사조가 흘러 퍼져서 어른이라도 시대풍조(風潮)만을 따라 말하고 인문(人文)이 땅을 쓴 듯이 남음이 없으니 크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를 당하여 우리의 대동보를 간행케 된 것은 중차대한 과업인 것이니 많이 발간하여 각자 보관한다면 오는 자손들이 거의 조상을 잃을 사람이 없으리니 어찌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 아니냐? 그러나 한편으로 유감되고 애석한 것은 북한 종친의 계보 수록이 불가능한 실정이니 송구한 마음을 금치 못하노라. 조속히 통일이 성취되어 다음 족보 할 때에는 이러한 불행이 없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내가 마땅히 보소의 끝자리에라도 나아가 참여해야 할 것이나 몸을 빼낼 겨를이 없었더니 여러 종씨가 부단히 협조하고, 임원 여러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고하여서 보사의 완성을 보게 되니 깊이 감사하는 바이며 나같이 견식이 얇고 성의도 적은 사람으로서 어찌 가히 용납될 수 있으랴만 그 단합되는 성의를 흠모하여 감히 고루한 말로써 감히 쓰는 바이다.

 

 

61세손 아찬공 윤식
나라에는 역사가 있고 집안에는 족보가 있으니 족보가 있으니 족보란 것은 한 집안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 인씨의 계통이 생기게 된 것은 시조이신 서(휘 瑞)께서 중국 진(晋)나라 혜제(惠帝)때에 풍익(馮翊)땅의 대부(大夫)로서 신라 유례왕 당시에 사신을 나오셨는 바 왕이 공경하고 정중히 여겨서 태상박사(太常博士)와 아찬(阿餐 : 正六品 벼슬)을 내리고 교동백(喬桐伯)을 봉하여 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관(휘 觀)께서는 솜을 팔때의 청렴으로 해서 벼슬을 내린 옛 역사가 내려오고 있으니 집안이 청빈(淸貧)하였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후로도 집안의 명성이 대대로 이어져서 끊이지 않았으며 큰 벼슬마저 이어졌는바 고려 인종 때에 이르러서는 한림학사이신 빈(邠)께서는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지고 문정공(文貞公)의 시호가 내렸으니 가장 현달(顯達)하신 분이며 공민왕때에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이신 당(휘 璫)께서는 문무(文武)를 겸하여 현달하셨으며 충성심과 절개가 높으시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기를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벼이 여기사 세상에서 고려 대충신이라고 칭송해 오고 있는 것이다. 고려말에 판밀직을 지내신 원보(휘 原寶)께서는 이성계의 혁명 당시에 대의(大義)로써 최영 장군을 따르다가 귀양을 가서 죽음까지 당하셨으나 제대로 신원(伸寃 : 즉 死後의 사면과 복권을 뜻함)을 얻지 못하매 그로부터 자손들이 시골로 낙향하여서는 제대로 펴 나가지를 못하였으나 의리를 지켜 조용히 삶을 영위하면서 세상의 공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청한(淸閑)한 집안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난리를 지내오매 보첩이 유실되어 대수(代數)가 더러 누락되었고 파계(系派)가 명확치 못하므로 이를 항상 생각하매 한탄스러웠는데 이번의 七회 갑자보 편찬에 이르러 대종회 초대총무 영철(永哲)씨가 여러 해를 걸쳐 널리 선대 역사를 모아 연구한 끝에 강본(姜本 : 즉 姜栗溪家藏諸姓譜)이 옮음을 논증(論證)하여 이를 추진 수보(修譜)케 되었는바 계대(系代)가 뚜렷하고 항렬(行列)의 규모가 하나도 오차(誤差)가 없어서 두루 읽어보매 심신(心神)이 쾌활해져서 기쁜 마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겠다. 강본(姜本)이란 것은 이조 중종때 율계 강필동(栗溪姜必東)이 고려 만성보를 구해다가 보존하여 대대로 전해 온 고적(古文)인 것인데 그 후로 각 성씨들이 살펴보아 누락된 것을 증보하고 잘못을 수정함에 있어 조금도 의심이 없이 훌륭하다고 찬양하였으며 향현사(鄕賢祠)까지 세워서 숭배하여 온 것이다.

사람으로서 족보가 없으면 세대가 오래된 후세에 와서 소목(昭穆)의 차례와 종손 지손의 계통을 무엇에 쫓아서 알 것이며 효도와 공경하는 마음과 일가간의 정의가 어디 로부터 비롯하여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집안에 족보가 있게 됨이 모두 여기 에서 유관(有關)케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번 족보의 중수(重修)에 당하여서도 남북이 분열되어서 이북의 일가들이 함께 족보를 하지 못하니 유감천만인 것이다. 오직 다행한 것은 이번에 함께 족보를 하는 사람들이 이로부터 근원을 헤아려 근원과 흐름을 살펴보고 돈목(敦睦)을 닦으며 조상의 덕을 생각하고 자손은 이를 본받아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게 훈계해 나간다면 높으신 조상의 거룩한 자취가 길이 서로 전해 가리로다. 다만 八十 노년의 이 몸은 정신이 혼미하고 기력이 떨어져서 족보하는 큰일에 능히 조력치 못하였으나 깊은 감사의 마음만이 많을 뿐이며 족보일이 잘 되어가매 이후로 부터 모든 일가들이 크게 번창할 것을 기원하면서 이어서 한시(漢詩)로써 칭송하는 바이다.

‘有感詩’
높으신 조상님의 경륜이 우리나라로 나오시니
왕이 경중(敬重)히 숭배하여 아찬(阿餐)을 삼으셨네.
신라 조정의 높은 벼슬은 천 년 전에 빛나는 일이었고
고려말의 훌륭한 충성한 백대에 까지 길이 이어지리.
교목나무(喬樹 : 즉 喬桐印氏)의 어진 바람에 봉황새는 채색(彩色)을 드리우고
오래된 소나무가 달빛을 맞으매 흰 학(鶴)마저 둥지를 트누나.
가훈을 이어오매 빛나는 자취가 역사에 실려졌고
음덕은 유전하여 긴 세상에 무궁하리라.

 

 

61세손 덕산파 사택
족보란 무엇인가, 조상을 높히고 일가간의 화목(尊祖敦族)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三十년을一世로 삼았고 또 三十년마다 족보를 한 것은 세상이 변해가고 사람 역시 떠나가서 出生과 慶事와 別世 등을 누락없이 기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一世=三十년마다 족보를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증손, 고손이 되고, 有服之親이 無服之人이 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거리의 行人과 같이 멀어진다. 비록 親한 이와 踈遠한 이가 있고, 멀고 가까움이 있으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같은 선조의 血緣이니 어찌 소홀히 지내랴? 대개 나무는 뿌리가 있고, 물도 또한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는 서로 이어져서 서로 앉고 있는 것 같아서 가지와 잎새마다 그 脉이 서로 통하고 그 기운이 똑같아서 때에 따라 무성하다가 잎새가 떨어져서 나무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물도 강을 이루어 굽이 굽이 와 물가닥이 근원에서 나뉘어 흘러서 四方으로 통하여 써도 다하지 않아서 그 공이 天下보다 더 큼이 있으니 하물며 人間이랴.

우리 인씨는 고려 석성부원군 「당」의 후손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초기에는 벼슬이 훌륭했으나 중엽 이후부터 不振하였으나 忠孝의 家風만은 솜처럼 이어져서 옛 名門의 古風을 잃지 않았다 하겠다. 그러나 歷年이 멀어지고 여러번 변천하매 후손들이 경향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어 生死를 서로 모르게 되니 지금 만약 족보를 다시 하지 않으면 혹 산만해져서 모두를 기록치 못하게 될 것이다. 슬프도다! 조선개국후 五百十九년만인 순종 때 경술국치로 韓日合倂이 된 것은 우리나라의 가장 罔極한 일이었다. 그 후 三十六년 왜정 乙酉년을 거쳐 八․一五광복후 五년만에 六․二五사변이 있었고, 또 南北分斷으로 서로 대치한 지가 지금 四十년이 되니, 이 또한 민족 비운이 막심케 되었다. 지난 壬寅년(一九六二년) 족보한 후 二十二년이 된다. 금년 갑자년 첫봄에 대종회로부터 修譜를 全國八道에 通文을 내매, 이에 즈음하여 여러 일가들이 빠짐없이 入單 호응하여 비로소 편찬케 되니 이는 우리 인씨문중의一大慶幸이다. 그러나 국경 분단으로 북한 일가들이 同譜치 못하여 이것이 痛恨이다. 이제 바라는 것은 불원장래에 통일이 되어 同譜케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다리노라. 불초 史澤이가 외람되나 同族이므로 외람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소감을 간략히 써서 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