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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손 덕산파 현국
슬프다! 나무가 천개의 가지가 있으나 그 근본을 찾으면 하나요, 물이 만개의 지류가 있으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것이니 이제 사람에게 있어서도 조상과 자손이 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맨 처음에는 모두 원줄기(原)에서 가닥(派)으로 나뉜 것이며, 가지로 연(連)하여 분별케 된 것이니 비록 친(親)함이 다하여 복을 입지 않는 먼 촌수에 이르러서도 파(派)가 나누어지고, 가지가 갈라지게 되었다 해서 하나의 근본이요 같은 근원임을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슬프다! 우리 인씨의 유래(由來)가 연면(聯綿 : 오래 내려온 것)하였으되 난리 끝에 족보가 전해지지 못하여 문헌으로 족히 증거 할 수가 없으매 전에 나의 종증조님 유장(有章)씨와 족숙 언신(彦信)씨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족보 간행에 뜻을 두시고 여러 해 정성을 기울여 국사를 모으고 야사(野史)를 찾아서 서로 편찬하여 드디어 보첩을 이루게 되니 이는 우리 집안의 믿을만한 글이(信筆) 되는 것으로 시작한 지 오래되어 거의 탈고(脫稿)케 되었는데 홀연히 돌아가시니(上征) 어찌 온 문중의 불행이 아닌가? 그 뒤 무자년에 여러 종씨들이 상자속에 보관된 것을 꺼내서 인쇄하여 전케 되었으니 우리 집안의 전보(全譜)가 있게 됨이 실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뒤 세월이 여러 해가 되어 이미 육십여 년이 되매 각파의 흐름이 점점 멀어지고, 자손들이 더욱 많아져서 진실로 이 때에 다시 발간(重刊)하지 않으면 지금의 잎새와 물 가닥을 몰라서 소노천(蘇老泉)의 거리 사람을 보듯 한다는 기롱과 같이 될 것이매 내가 용렬하나 이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여러 일가분들과 함께 이 사업을 마치기를 도모케 되었다. 두루 서적을 증거하여 그릇 전해진 것과 잘못을 교정(攷校)하고 누락된 것을 더 보충하여 보첩이 거듭 새로워지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일가의 큰 경사가 아닌가? 돌아보건대 나 같이 불초하여 고루하고 쇠퇴한 나이로 조상을 높이고 일가에 화목하는 도(道)에 있어서 어찌 감히 능(能)하랴마는 선부형(先父兄)의 창간하신 손때를 대하매 실로 마음에 감동되어 착수하게 된 것이다. 오직 기원하노니 여러분(僉君子)께서는 대수(系世)의 큰 집과 지손(本支)된 것을 범연히 여기지 말고, 서로 도와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된다면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거듭 간행(重刊)하는 본 뜻에 부합된다 하겠다.

 

 

57세손 면천파 두칠
꽃과 풀을 보더라도 또한 족보가 있음이랴? 맑은 물에서 씻은 듯이 서 있음은 군자(君子)같은 연꽃이며, 지는 해를 맞아 채마밭에서 그윽한 향기가 있음은 은둔(隱逸)의상징인 국화이다. 모란꽃의 부귀와 복숭아와 오얏나무의 꽃다움 같은 것도 두루 같은 종류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다. 혹은 머리를 숙여 근본을 돌아보는 듯 하고 혹은 넝쿨을 뻗쳐서 뿌리를 도와서 근본을 잊지 않음이 있는 듯 하니 이런 생물들도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되고서 무지(無知)한 풀과 나무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슬프다! 우리 인씨의 선조께서는 또한 교목의 오래된 집안(喬木世家)이었으나 보첩이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여 씨족이 비록 많으나 본류와 지파(本支)를 분별할 수가 없으매 친함이 다하여 노상행인을 대하는 것 같은데 이른 것은 진실로 형편이 그렇게 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지난 무자년으로부터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케 되어 할아버지에 손자가 있게 되고 손자는 조상을 모시게 되어 겨우 기롱(鐵爐之譏)당함을 면케 되었으니 이는 이 소경의 아름다운 매화(騷經之漏梅)와 산골짜기의 그윽한 난초와 같이 귀중타 하겠고. 가히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가지로 연해 나간 뜻을 살린 것이라 하겠다. 이번에 재종질 재현(載鉉)과 일가분 영수(榮洙)씨가 족보 중간(重刊)을 계획하여 두루 호남․호서․영남지방에 알리고, 널리 서적을 찾아보고 구보(舊譜)를 참고하여 우리 일가의 믿을만한 역사책을 이루게 되니 이는 주역에서 말한 훌륭한 동족이 모여서 다시 오늘에 나타난 것이라 하겠으며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을 어찌 붓으로 모두 쓸 수가 있으랴. 돌아보건대 나는 학식이 없고 몽매함에도 욕되이 여러 일가의 위에 있으되 족히 보소에 나와서 일을 돌보지 못하고 여러 종씨의 효심과 돈목의 고운 뜻을 힘 입어서 인쇄의 끝자리에 참여하였으나 가히 침묵하고 한마디의 말도 아니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꽃과 풀도 족보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써 인하여 경고하는 바이다.

 

 

57세손 함창파 경
나의 조부(王考)이신 영모재(永慕齋) 휘 구문(龜文)께서는 시묘를 二十五년 사셨으니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숭모함과 일가에 화목하고 일가들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모두 그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오직 뜻을 두고도 성취하지 못하신 것은 곧 족보 간행인 것이다. 세계(世系)가 약간 밖에 남지 않음을 슬퍼하고, 일가들이 흩어져 사는 것을 한탄하시어 날마다 여러 사촌 조카들과 함께 성씨학(姓氏之學)을 외우게 하였고, 장차 글을 띄워 수단을 모으려 하시다가 불행히 돌아가시어 탈고(脫藁)를 보시지 못하셨고, 그 뒤 나의 당숙 정평공(靜坪公, 휘 光潝)께서도 이 뜻을 이루고져 하다가 결실을 보시지 못하였다. 다만 규격대로 한 권의 가보(家譜)를 써 놓으셨고, 또한 적은 분량의 서문이 있는데 후에 “족보하는 사람이 참고하라”고 하셨다.

슬프도다! 지금의 족보하는 것이 공(公)과의 거리가 한 돌도 되지 않으매 손때 묻은것이 아직도 선명하니 어찌 책을 어루만지매 슬프지 않으랴. 만일 공으로 하여금 수년만 더 사시었더라면 우리 조부님의 뜻을 가히 기록하여 유실된 세계도 족히 서로 고증해 내셨을 것이요, 흩어진 일가들도 또한 단합하여 화목할 수 있었을 것이니 정자(程子)가 말한 바 “근본을 잊지 않고져 하면 계보를 밝혀야 한다”고 한 것이 멀지 않아 반드시 이룩되었을 것이다. 슬프다! 오직 외로운 이내 몸은 몽매하고 고루하여 능히 가훈(家訓)을 지켜서 받들지 못하였는데 다행히 우리 일가 어른들이 높은 지식으로 일을 주간하여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순후히 하는 뜻에 힘입어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고 드디어 나의 소원을 이루게 되니 그 우리 집안에 유공(有功)함이 크다 하겠다. 이에 느낀 바를 기록하여 나의 간절한 심정을 표하나 어찌 감히 책임 맡으신 분의 채택이 있기를 기약하리까.

 

 

57세손 함창파 수
장방국지(掌邦國志)책에 “세계(世系)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한다”함은 주(周)나라 소사씨(小史氏)가 만든 법(法)이요. “세상의 인심을 다스리자면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순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남 정부자(河南程夫子)의 훈계라 하였다.

슬프다! 근래 이래로 오랜 가문(世家)의 서적들이 이미 없어지고 보학(氏族之法)을 강론치 않게 되어 우리 일가로 팔도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장차 노상행인을 대하듯 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근본을 생각하면 시조 한 분의 몸으로부터 흩어져서 백천만 사람이 되게 되니 시조의 마음으로 본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우리의 선조 학사공(學士公, 諱 邠)께서 함창(咸寧縣 : 舊地名)으로 귀양오셨다가 돌아가셔서 묻히시어 자손이 드디어 살게 되니 그 유래가 또한 오래라 하겠다. 예전에는 세보(족보)가 있었고 나의 七대조 감역공에 이르러서 중간(重刊)코져 한 일이 있었으나 세대가 오래되매 사적이 없어져서 그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겠고 지금 집에 남아 있는 것이 다만 좀먹은 책 一권뿐이다. 이로해서 나의 돌아간 아버님과 당숙 응화(應和)씨가 일찍이 이를 슬피여겨 족보 발간을 추진한 것이 四十여년간 이었으되 끝내 그 뜻과 사업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그 슬픈 뜻이 감고부(感古賦)와 가보서(家譜序) 두어 편에 쓰여져 남아있을 뿐이다. 후세의 여러 직계 자손이 지하에서 바라시는 뜻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고 정녕(丁寧)히 훈계 남기신 것이 아직도 생생히 귀에 남아 있는 듯하다. 다행히 호서지방의 종인 재현(載鉉)씨와 여러분이 널리 문의 고찰하고 무자년 구보(舊譜)를 참고하여 와전된 것을 분간하고, 의문점은 물어서 우리의 역사를 꾸며 나의 선부형(先父兄)의 뜻은 품었으되 미처 못해내신 것을 이룬 그 공적이 어찌 감동되고 훌륭하지 않으랴. 주역에서 같은 사람의 모습을 논하기를 군자는 그 종류로써 온갖 사물을 분간해낸다 하였으니, 무릇 족보의 기록은 장차 일만의 흐름이 그 근원이 같음을 생각게 하고, 일천의 가지라도 뿌리가 하나로 합해 놓아 비록 수십 대까지 멀어지고, 천백 리의 먼 거리에 있어서라도 족보를 보면 모두 슬픈 생각에 골육지정(骨肉)의 아름다움이 생겨날 것이니 옛말에 소목(昭穆 : 즉 行列)을 분간케 하여 일가들을 모은다 함을 오늘날에 행하매, 책을 펴 들자 일목요연(一目瞭然)한 분들이 모두 우리의 조상이요, 자손이어니 우리 시조의 마음으로 미루어서 백세(百世)까지 이르도록 잊지를 않게 된다면 이 족보가 특히 세상교화에 유관(有關)치 않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인씨로서 누구인들 감동되어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절로 일어나지 않으랴?

우리의 시조 아찬공(阿餐公 : 이름 瑞)께서 대개 교동백(喬桐伯)에 봉(封)함을 받은 때로부터 덕(德)을 심고 어짐(仁)을 쌓아서 실로 후손을 돕는 사업을 삼으셨고, 그 모범을 끼쳐주사 이로써 대개 가업을 잇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의 잘못을 간(諫)하다 듣지 않자 고요히 물러나와 연안(延安)에 별장(別墅)을 꾸려 사셨고(諱毅) 또 시(詩)나 짓고 술을 즐겨 보문각(寶文閣)의 어진 이와 문관들이 자주 모이셨고, (휘 邠을 지칭함) 두 분이나 옥당(玉署)에 올라 아울러 몸 바친 충성을 다하셨으며(휘 候, 휘 承旦을 말함)세 분이나 금도끼(金鉞 : 장군의 무기)를 잡고 모두 적을 물리친 공훈을 세우셨도다. (휘大紳, 휘公秀, 휘璫을 말함) 또 사재(思齋 : 휘臣彦)와 경암(敬菴 : 휘 紀)의 문장(文行)에 이르러서는 가히 후세의 사표(師表)가 됨이 있었고, 감역공(監役公 : 咸昌五十世 諱汝允)의 모범된 행실(檢行)과 선무랑(宣武郞 : 휘 滌)의 순절(殉節 : 丙子胡亂에 勤王타가 화살에 맞아 순직)은 모두가 나의 가풍세덕(家風世德) 아님이 없었는데, 자손이 번창치 못하여 이에 이어서 훌륭함을 계승치 못하였으나 우리는 벼슬하신 조상님의 오랜 전통의 족벌인 것이다. 선인(前烈)의 깨끗(純淑)함을 아름답게 여기매 어찌 조용히 길이 추념(永思 : 즉 追念)치 않으랴? 사마천(馬遷)의 서문과 육기(陸機)의 지은 것이 또한 이로써 지은 것이다. 수(璲 : 글쓴이 이름)에 이르러서는 학문도 없고 불초하여 선대의 훌륭(先休)함을 천명해 드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한 마디의 말을 보첩 사이에 넣을 수 있겠는가마는 보첩이 이미 이루어질 때 호서지방의 여러 일가께서 나에게 발문(跋: 책 끝에 맺는 말)을 하라 하므로 졸렬한 글이나마 아니할 수 없기로 대략 위와 같이 쓰는 바이다.

 

 

58세손 면천파 재현
정부자(程夫子)의 교훈에 이르기를 “천하의 인심을 거두자면 일가를 거두고 풍속을 순후케 하여 보계(譜系)를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맞도다 이 말씀이 여! 족보의 계통이 명확치 않으면 누가 일백의 파(派)가 같은 근원임을 알아서 조상님을 높이고 일가에 공경하여 효도와 공경의 마음이 생기겠는가? 우리 인씨족보가 처음으로 영조 무자년에 이뤄졌으니 이는 홍신(弘信)씨께서 이산부(伊山府 : 지금의 德山)에서 간행하여 지금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다.

슬프다! 이 족보를 간행한 지가 六十여년의 오랜 세월이 되었으되 후대 자손으로 하여금 한 근원의 친함을 모두 알게 됨은 진실로 우리 일가의 크나큰 다행으로서 이 또한 우리 선조의 적덕과 효도를 행한 후의 경사가 아니겠는가? (聖上)께서 바야흐로 돈목의 교화를 일으키시고 국가가 태평하여 모든 성씨들이 보첩을 만듬이 많게 되었다. 교동인씨는 오래된 집안의 벼슬해 내려온 후손으로서 계파(系派)가 많아져서 내외(中外)에 흩어져 살며 자꾸 늘어만 가는데, 수십년내로 족보를 하자는 논의가 겨우 시작되다가는 이내 그치게 된지가 오래 되었었다. 내가(小子) 비록 학식이 없고 훌륭치 못하나 연조가 점점 멀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족보한 지가 여러 해됨을 아프게 여겨오다가 작년 가을에 족종조 명옥(命玉)씨 족종 영수(榮洙)씨와 함께 장단(長湍)의 시향(省楸之行)에 가게 되었는데 인하여 개성(松京)에 가서 널리 옛책을 찾아보고 교동까지 가서 널리 전해오는 보첩이 있나 물어보고 돌아와서 드디어 족조 현국(顯國)씨, 재종숙 두칠(斗七)씨와 함께 족보 간행의 발의를 정하였다.

명옥(命玉)씨는 호남으로 수단(收單) 갔다가 중도에 병으로 돌아와서는 뜻을 간직한 채 갑자기 돌아가시니, 비통한 일이로다. 나는 영수(榮洙)씨와 함께 또 함창에 가서 현지(縣誌)를 얻어 보아 학사공(이름 邠)의 문장과 함산군(咸山君 : 이름 元寶)의 장렬한 유적들이 실로 후손을 돕고 모범을 끼치신 것을 똑똑히 문헌으로 고증케 되니 어찌 감격하여 눈물이 흐름을 이기겠는가? 더구나 그 곳 일가 수(璲)씨 집의 전해오는 책에 고금(古今)의 것이 훌륭히 있어서 한 번 보아도 잘 부합되므로 힘을 다해 함께 일해 보기로 하였고, 순창의 일가 정오(定五)씨가 해박한 지식으로 정성을 기울여 성취를 도모해 주어, 나로 하여금 일을 끝맺게 해 주니 나같이 몽매함으로도 선대의 훌륭함을 밝히고 오는 자손을 열어주는 이 일에 있어 어찌 감히 한 말씀을 써 넣을 수가 있으랴. 그러나 정성을 쏟아 뜻을 이루고 힘써 종사하기를 근엄히 하여 시작한지 二년만에 드디어 끝맞춤에 이르게 되었으나 여러 임원(僉執事)의 효성이 미침과 우리 선조영혼의 굽어 살피심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에 이르게 되었겠는가.

슬프다! 이제 지난 일을 계술(繼述)하매 천만세에 이르기까지 몇사람이 능히 선대의 뜻을 이어서 이 족보를 닦아서 끊어지지 않게 할지 모른다 하겠다. 이에 우리 일가분 의 무궁하기를 고(告)하는 바이다.

 

 

58세손 덕산파 영수
아아! (於戱) 한 사람의 몸이 나뉘어 길거리의 행인(塗人)같이 됨은 대개 노소씨(老蘇氏)의 심히 슬퍼한 말인 것이다. 사람이 성씨를 받음이(受姓) 하나의 본관에서 비롯하되, 그 가지가 나뉘어 천만개가 되며, 나뉘고 또 나뉘어서 그 족속이 날로 멀어지매 천륜의 아름다움도 서로 길거리의 남남이 되지 않는 자 거의 없으니 마땅히 이를 소씨(蘇氏)가 슬프게 여긴 것이다.

슬프다! 우리 시조 아찬공(阿餐公 : 휘 瑞)께서 교동백에 봉함을 받고 덕(德)을 쌓고 어짐(仁)을 심으셨으니, 실로 후손을 돕고 그 모범을 끼쳐 주시었다. 신라 고려를 지내오매 대대로 큰 벼슬(世公世卿)을 하시어 드디어 우리나라의 뚜렷한 성씨(著姓)가 되었으나 여러번 난리(兵燹)를 지내와서 보첩이 전치 못하매 아득한 세월이라 그 가닥(其派)을 헤아릴 길이 없게 되었고, 외처럼 이어져 주렁주렁한 자손들이(緜綿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