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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옛적부터 성씨(姓氏) 가진 집안에 종가(宗嫡)와 지손(支孫)이 있음은 나무가 근본과 줄기와 가지(枝條)가 있고, 물도 근원과 나눠져서 흐름(派㶁)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나무가 근본이 있는 것은 가지와 곁가지가 그늘져 덮고, 가지가 뻗쳐 서로 섞였으매 여기서 그 근본을 찾고자 하려면 반드시 그 곁가지를 따라가서 그 가지를 찾아보고 그 가지를 찾아서 그 줄기를 쫓아가 보고 그 줄기를 쫓아서 그 근본을 찾아보면 근본이 스스로 있을 것이며, 물도 근원이 있음은 물이 나눠져 흐른 가닥과 물갈래가 이리저리 뻗어져서 물 가닥과 파도가 서로 섞여졌는데 여기에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려면 반드시 그 물갈래를 따라가서 그 나눠져 나간 것을 좇아가 보고, 그 물 나뉨을 좇아가서 그 샘을 더듬어 보고, 그 샘을 더듬어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근원이 스스로 있게 되나니 사람도 지손(支孫)으로부터 종가(宗家)에 이름이 어찌 이와 다르리요. 이로써 보건대 족보법이 만들어 온 것이 대개 이세서 연유되었다 하겠다.

슬프다! 우리 인씨의 선조께서 신라와 고려로부터 문벌(門閥)이 빛났고 벼슬이 연이었다가 이조(李朝)에 이르러서 조금 어두워졌으나 어찌 오히려 복이 아니라고만 하겠는가? 옛날에 병계(屛溪 : 별호임) 윤상서(尹尙書 : 즉 尹鳳九 판서)와 남대(南臺 : 별호임) 김집의(金執義 : 즉 金愚淳 참판) 및 운양(雲養 : 별호 임) 김보국(金輔國 : 즉 金允植 대감)의 여러 어른께서 우리 족보에 서문을 쓰시고 탄식하신 것이 진실로 이럼으로써 그러하셨던 것이다. 이루 족보의 간행이 영조때로부터 비롯하여 二백년 동안에 세 차례나 거듭 간행하였었는데 나의 증조이신 진사공(휘 載鉉)께서 몸소 스스로 교정하고 꾸미시어 법과 조례(條例)를 마련하심이 정정(井井)하여 문란치 않게 하셨는데, 그 후로 七十년의 사이에 낳은 자손들이 점차로 번성해져서 후손들이 따라서 멀어져 가고 보첩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매 가까워도 서로 이름을 알지 못하고 멀어져서 서로 얼굴도 알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가끔 있게 되어 타성(他姓)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가까운 이수에게서 조롱을 받게 되니 실로 마음에 한탄한들 어찌 하리요. 이렇게 되매 일가 아우 근식(謹植)이가 더욱 오래되면 그 옛것까지 잃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힘을 내고 돈을 수합하여 중간(重刊)의 일을 당질 장환(章煥)의 집에 개설(開設)하매 일가 대부 영태(榮台)씨, 종화(鍾華)씨, 현기(鉉綺)씨와 일가 아우 영식(榮植), 봉식(鳳植), 정식(正植), 경식(敬植), 경식(慶植)씨가 그 일을 도와서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단 계승의 일만이 아니요. 또한 가히 선조께서 끼쳐주신 법을 위하는 길인 것이니 실로 감복될 바로다. 그리고 인쇄에 쓰일 한지(漢紙)는 전주 일가 창환(昌桓)씨가 자청하여 분담하였으니 그 성의와 성력(誠力)은 또한 부럽고, 감탄케 된다.

내가 요즘 족보를 하는 집들을 보건대 혼잡해져서 곽숭도(郭崇韜)가 자의(子儀)의 묘에 절하게 되고 두정륜(杜正倫)이가 원개(元凱)의 족보에 들어가 있게 됨이 가끔 있어서 족보를 깨끗이 해야겠다는 말들이 있는데 우리 인씨의 족보는 바로잡지 않았어도 스스로 바르고, 맑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맑으니 우리 집안의 후손들은 능히 이 법을 좇아서 지켜 잃게 하지 않는다면 거의 우리 집안에는 빛이 길이 후세에 까지 있으리로다. 내 금년 나이가 팔십에 가까우매 한 몸에 병이 얽매여서 생활을 겨우 이어오매 행동은 엄두도 못 내게 되어 보소(譜所)에 나가지 못하고 다만 두어 줄의 거칠 말로써 여러 일가의 수고에 감사드리고 오는 후손이 잘 지키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서기 一九三六年 丙子 仲春下浣 六十一세손(면천) 通訓大夫前行中樞院議官 東植 謹序

 

 

편찬위원
도 유 사 홍수(면천)
부 유 사 근식(면천)
고      문 동식(면천) 희배(덕산) 영태(덕산) 태국(함창) 정석(면천)
장      재 철식(면천) 장환(면천) 창환(전주)
교정유사 종화(덕산) 봉식(면천) 명수(토산) 영식(면천) 현기(덕산) 정규(정규) 병하(파주) 종구(덕산) 경식(면천) 응수(면천) 창영(평산) 홍섭(토산) 풍식(풍식)
감      인 봉식(면천) 현기(덕산) 영식(면천)
서      기 경식(면천)
서      사 鵷洙(면천) 봉환()  창환() 세배(덕산) 헌수(덕산) 치명(면천) 용기(순창) 승식(면천)

 

 

속변 58세손 영태(덕산)
속변(一九三六년 병자보)듣건대 우리나라에는 본래 인성(印姓)이 없었다고 하는데(이것은 신라 유례왕 이전을 뜻함) 신라 역사를 살펴 보면 인관(印觀)께서 솜을 팔 때 정직했던 일로 해서 벼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시조(東來 시조 印瑞)의 東來하시기 五년전에 있었다 하였으니(一回譜에 이렇게 와전기록을 말함이니 즉 휘瑞의 東來시기를 기림王 五年으로 알았던 것을 뜻함) 우리의 족보 중에서 가장 첫째가는 문제점이었던 것인데 강본(姜本 : 율제강필동만성보의 약칭으로 以下同)에 보면 시조(휘瑞)께서 우리나라에 오신 것이 먼저 있었다고 하였으니(印觀의 父로 表示) 가히 강본(姜本)을 믿을 만한 것이 첫째번의 이유라 하겠고, 교동읍지(喬桐邑誌)와 역대년기(曆代年紀)를 살펴 보건대 교동은 신라 유례왕때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였다가 신라 문무왕때에 이르러 비로소 고구려로 합하게 되었고 또 신라 경덕왕(景德王)때에(경덕왕 즉위 : 西紀七四二년) 이르러 비로소 교동으로 개칭 되었으니 우리 인성(印姓)의 본관이 동래시조(휘瑞) 때문에 얻게 된 것이 아닌 것이라 하겠으니(교동은 신라 소유가 아니었으니 어찌 신라에서 교동백을 봉할 수 있었겠는냐는 뜻) 이 또한 일대(一大) 문제인 것인데 강본(姜本) 및 조선 씨족 통보에 의하면 학사공(휘邠)께서 본관(本貫)을 얻으신 중시조라 했으니 가히 강본(姜本)을 믿을 만한 것이 둘째 이유가 되고, 함산군(咸山君 : 휘元寶)의 묘소가 의당히 함창에 있어야 할 것인데 학사공(휘邠)의 묘소가 오히려 함창에 계시니 그 유래가 의문 되는데 강본(姜本)에 보면 이 두 분의 묘소 위치가 각각 옳은 것 같으니 가히 강본을 믿을만한 것이 세 번째 이유가 된다.
동래시조(휘瑞)로부터 시어사(侍御史 : 휘毅)공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세계(世系)가 유실되어서(신라때의 선조世系) 그 유래가 통한(痛恨)케 되였는데 강본(姜本)에 보면 누락됨이 없이 모두 실려져 있고 년대 차이가 없으니 가히 강본(姜本)에 보면 누락됨 이 없이 모두 실려져 있고 년대가 차이가 없으니 가히 강본(姜本)을 믿을 수 있음이 네번째의 이유가 되게 된다. 구보(舊譜)에는 선조님들의 이름자(諱字)가 항렬(行列)이 드물었는데 옛날이라 그러려니 여겨 믿어서 의심해 오지 않았는데, 고려사를 보게 되니 다른 씨족들도 많이 항렬(行列)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제 강본(姜本)에는 휘자(諱字 : 즉 이름)와 항렬(行列)이 정정(井井)히 맞고 조리가 분명하니 가히 강본을 믿을 만한 것이 다섯번째 이유가 된다 하겠다.
그 대략을 들게 되더라도 이와 같이 다섯가지가 가히 믿을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강본(姜本)은 아직까지 세상에서 공행(公行)치 않고 있으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고 하여 종중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으므로 준행(準行)케 되지 못하고 아직 부록(附錄)에만 적어 넣어서 후세의 고찰이 있기만을 기다리노라. 혹 어느 분은 보첩이란 내 집안의 역사인데 이미 우리 집안의 역사책이 만들어져 있으니 이제 남에 집의 만성보(萬姓譜)를 믿을 것이 없다고 이르니 슬프도다. 이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함이여! 이것은 옛적에 우리 집안의 보첩에서 기록되어 나온 것으로서 강씨(姜氏)네가 홀로 전해 내려온 것일 것이다.
세상에서 고적(古蹟)을 전해 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것이 없어질까 애석히 여겨서 전해 오는 것이어니 어찌하여 나와 남 사이에 차이를 두어서 말하겠는가? 내 일찍이 다른 씨족들의 집단 거주지를 보게 되면 그 댓수(代數)의 멀고 가까운 것을 물어보게 되 매 대개가 十二~十三世가 되어서 우리의 집안과 대개가 같으니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인 것이다. 대개 임진왜란 이전에는 또한 만성보가 있었을 것이고 처음에 만든 사람들은 반드시 각 성씨(姓氏)의 가보(家譜)에 의하여 만들었을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옛적의 우리 집안 보첩(譜牒)에서 나왔을 것이다. 또한 이 만성보가 이미 임진왜란을 만나서 전해옴이 없었는데 강씨(姜氏)네가 혼자서만 얻어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제 비록 아무리 잘 만든 책으로서 세상에서 공행(公行)된다 하더라도 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으면 취하지 않을 것이요, 비록 탈고(脫藁)되지 않은 초고(草稿)로서 먼지가 낀 상자 속에 있더라도 가히 믿을만한 것이 있으면 취할 것이어니 어찌하여 세상의 공행(公行)만을 따지겠는가? 또 강선생(姜先生)께서 살던 고장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하여 향현사(鄕賢祠)까지 세우고 또 서사(書社)까지 세워 주었으니 그 유지비와 향사비(享祀費)를 생각해 볼 때 이 어찌 숭배할 만한 실적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하였겠는가? 불초가 이에 느낌이 있으므로 간단히 우견(愚見)을 써서 그 일을 서문하여 이르는 바이다.

歲丙子仲夏上澣(一九三六년) 五十八세손(덕산) 榮台 謹書

 

 

속변 61세손 근식(면천)
불초가 평소에 항상 족보를 읽어보매『세수(世)와 파계(派系)가 상세하지 않으니 후세의 고증이 있기를 바라노라』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슬픈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실로 후세 고증의 책무(責務)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제五회 족보를 함에 있어서, 다행히 강율계(姜栗溪)집의 「喬桐印氏世系 : 교수(즉, 교동)인씨세계」를 얻게 되어 부록케 되매 같은 十一世 종형이신 봉식(鳳植)씨가 이것을 보고 놀래며 탄식하여 말하기를『이런 것이 있음이여! 강씨네가 우리 인성 이 전치 못한 것을 전해 오니 이것이 고대의 만성보로서 세상에는 전해지지 않은 것을 강씨네가 혼자서만 전함을 얻은 것이 아니냐. 구보(舊譜)에서 빠졌던 세대들이 이제 모두 사실을 기록케 되었고 연대가 차이 나지 않고 세상을 빛낸 벼슬들이 이어서 끊어지지 않았으니 비로소 대대로 큰 벼슬(世公世卿)을 하였다는 말이 과연 헛된 말이 아님을 알겠도다. 그러나 우리의 시조 아찬공(阿餐公 : 휘瑞)의 사적이 족보와 갈지 않음은 어쩐일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拜)했다는 말은 생각컨대 또한 전해 오는 말에 의한 것 같고 역사책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뜻에 있어서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아찬공(휘瑞)께서 일찍이 풍익대부로서 신라로 사신 오셔서 우리나라가 살만함을 알게 되셨고, 또 진(晉)나라 혜제가 용렬하고 어두워서 장차 세상이 어지러을 것을 예견하시고 다시 식구들을 거느려 우리나라로 나오셨을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중국을 숭모(崇慕)함은 단군 기자 조선때로부터 이미 그러하였을 것이니 신라왕이 경중(敬重)히 여겼을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갓나오신 나그네 신하에게 반드시 의심되는 마음도 없지를 않았을 것이니 어찌 요직을 주었겠는가. 차라리 조위노(趙魏老)로서 대접하였고, 반드시 대부(藤薛大夫)의 직(職)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의 관제(官制)를 비록 고찰해 보지는 않았으나 태상박사(太常博士)는 반드시 청환(淸宦 : 한가하고 깨끗한 직책)일 것이매 뜻에는 의문이 있을수 없다 하겠고, 또 공의 아드님 관(觀)께서 솜을 팔아서 곡식으로 바꿔 오시다가 솔개한테 채였다 하니 집안의 가난함을 가히 알겠도다』라고 말하였다.
봉식(氣植)씨가 또 말하기를『그러면 옛족보에서 시조(휘瑞)에게 기림왕때 그 청백을 포상하여 아찬(阿餐) 벼슬을 주고 교통백에 봉하였다 함이 모두 그릇된 것인가?』라고 물어오매 내가 답하기를『우리나라에는 토성(土姓)으로서 인씨가 없었으니 공께서 동래시조(東來始祖)라는 말과 큰 아드님이 솜을 팔았었다는 일에 이르러 생각컨대 마땅히 유례왕때가 옳다 하겠고 아찬벼슬을 하셨다 함은 모르겠으나 교동백이란 것은 아닌 것이다. 그때 교동이 고목근현(高木根縣)이였고 또한 신라의 소유가 아니었으니 또한 전연 근거없는 말도 아닌 것이나 대개 이것이 실로 아드님 인관(印觀)께서 賣綿의 일이 아찬공(印瑞)의 일로 와전된 것인가 한다.
또 우리 인성의 관향(貫鄕 : 本貫)이 교동이므로 벼슬을 주었다함이 의문되고 또 교동백도 아님에도 와전(訛傳)된 이 말이 흘러 올수록 참말이 되어서一천四백七십여년이 지난 이조 영조무자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족보할 때 그 전해옴을 믿어서 오기(誤記)케 되었고, 인관(印觀)이란 분이 계셔서 아찬공(휘瑞)의 맏아드님이 되시는 것도 알지를 못하여 드디어 누보(漏譜)까지 된 것이니 우리나라에 본래 토인(土印)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냐』라고 하였다. 봉식씨가 또 말하기를『초당공(草堂公 : 휘邠) 사적이 또한 국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강본에는 봉군(封君)이 있고 시호(諡號)까지 있으니 가히 믿을 것인가?』라고 하매 내가 말하기를『봉군(封君)과 시호를 내리는 것은 조정의 법(優典)제도인데 국사에 나타나지 않음이 이상한데 훈봉(勳封)을 받지 못하여 그러한지 또는 문인(門人)들이 사사로이 시호하여 그러한지 국사에 빠져서 그러한지 혹은 있는 것을 잘못 본 것인지 여기에 있어 알 수가 없으나 가히 믿지 않을 수 없음은 교동이 이미 아찬공(휘瑞)의 봉읍(封邑 : 교동백을 뜻함)이 아닐진대 관향이 된 유래가 반드시 있으리니 이것은 더욱 잘 살펴 보아야 할 대목인 것으로 조선 씨족통보를 고찰하건대 교수(喬樹 : 즉 교동의 별호) 인씨시조 빈(邠)이라고 한 것이 강본(姜本)과 같이 서로 같으니 봉군(封君)은 읍호(邑號 : 즉舊名)로써 하는 것이요, 읍명(邑名 : 지금 地名)으로써 하지 않는 유래가 오래 되였다.
교동은 초당공(휘邠)의 봉군한 읍호(邑號)인즉 공의 후손들이 모두 교수(喬樹 : 즉 喬桐)로서 본관을 한 것이 자명(自明)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봉식씨가 또 말하기를『교수와 교동은 실로 같은 것이나 호칭(呼稱)인즉 다른 것이니 본관을 교동으로 한 것은 어느때부터 교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가』라고 물어 오므로 내가 말하기를『비록 감히 확인하지 못하겠으나 고려말엽과 조선초기(麗末鮮初)부터인 것 같다. 대개 이때에 있어서 왕씨(王氏)들이 쓰던 제도는 이조(李朝)에서는 배척한 바가 되였던 것은 최영(崔瑩)전을 봐도 가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이태조가 등극하는 날을 맞아 우리의 선조로서 고려의 관직이 높았던 여러 어른께서 모두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으리니 우리 인씨의 五백년간 쇠약 부진케 된 것이 실로 이로부터 비롯하여 이후 시골로 낙향케 되매 옛 봉읍호(封邑號)인 교수를 버리고 지금 읍명(邑名)인 교동으로써 본관을 삼았을 것은 이 또한 시세(時勢)가 그러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봉식(鳳植)씨가 또 말하기를『고려방목(高麗榜目 : 즉 고려의 과거급제자 를 적은 책)을 보건대 다만 인승광(印承光)만 있는데 옛 족보에는 초당공(草堂公 : 휘邠)께서 十九人榜과 名士十二人中의 한 분이였다』고 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이에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이익재집(李益齋集 : 즉 櫟翁稗說)』에 실린 분들이 十九人이다.
그러나 고려사열전(列傳)을 보건데 윤관(尹瓘)은 문종때 급제하였고 김부식(金富軾)은 숙종때 급제했으니 대개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여러 대를 지나서 말한 것으로 선비들의 아름다운 풍류가 예종 인종때 성대하였다고 한 것은 당나라와 우나라(虞)의 사이에 융성하였다 함과 같은 것으로 같이 과거(同榜)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닌 것이다』라고 하였다. 봉식씨가 또 말하기를『이 강본에 학사공(휘邠)의 묘소와 석성부원군(휘璫), 판밀직공(判密直公 : 즉 咸山君임)의 묘소의 소재지가 모두 근리한 것 갈은데 강본대로 가히 확신하겠는가?』라고 물어오매 이에 내가 답하기를『비록 그러하나 아직은 확언(確言)치 못하겠다』고 하였다.
또 봉식(鳳植)씨가 말하기를『구보(舊譜)와 강본(姜本)이 모두 연성공(延城公 : 휘安)으로써 석성부원군(휘璫)의 큰 아드님으로 되였는바 가히 의심할게 없을 것 같은데 구보(舊譜)의 세계변의(世界辨疑)에서 세번째로 의심하였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하매 내가 답하기를 『이것은 당국(當局)의 일에 매인 일인데 옛날에 안부인들께서 잘못하여 군대모집에 편성된 것 같고 더구나 부자(父子)가 모두 훌륭한 장수재목으로서 함께 출전하지 않으면 공을 세을 수가 없었다면 어찌 사사일로써 임금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譯者註 : 이 항목은 곡해로서 국사에 있는바와 같이 父子간임) 봉식씨가 또 묻기를『구보(舊譜)에 판밀직공(휘元寶)께서 시랑공(侍郞公 : 휘海)의 장손(長孫)으로 되였음이 네번째의 의문점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손자(휘元寶)의 벼슬이 조부(휘海)보다 높은 것을 의문한 것 같은데 더구나 강본(姜本)에는 판밀직공(휘元寶)께서 오히려 시랑공(휘海)의 큰 아들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아버님보다 벼슬이 더 높게 되는 것이니 이 어찌 의심되지 않느냐』라고 하매 내가 답변하기를『시랑공(휘海)께서 왜적을 친 것과 판밀직공(휘元寶)께서 함창에 귀양 가신 것이 그 시기가 五~六년 사이의 간격인즉 같은 시대에서 부자가 벼슬하여 아들이 더 높은 것인데(姜本) 이는 같은 시대로서 같은 시일에 있음이 아닐 것이다.
만일 같은 때에 벼슬을 하신 것이라면 실로 의심되는 일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나 조부보다 벼슬이 더 높은 사람이 어찌 없었겠느냐. 휴직(休職), 복직(復職), 좌천(左遷)등이 있었다면 달이 다르며 시일이 갈지 않은데 五~六년의 사이로서 의심하겠느냐』라고 하였으나 이 문제는 고증을 세밀하게 해보고 생각해서 답변한 것인데 이 문제는 선부형(先父兄)들께서도 뇌심하시고 애쓰신 의문점이였음을 생각할때 더욱 황송하고 진땀이 흐르는 대목이였다.(譯者註 : 이 항목도 곡해로서 국사와 같이 휘海, 휘元寶께서 父子) 봉식씨가 또 묻기를『연성공(延城公 : 휘安)이하의 이름자가 족보와 강본이 크게 같지 않으니(大相不同) 장차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라고 하거늘 내가 답하기를『이 강본의 휘자(이름자)가 모두 항렬에 마추었고 소목(昭穆)이 서로 이어져서 가히 의심할게 없을 것 갈다. 그 때의 근세(近世)전에 김부필(金富弼), 김부일(金富佾),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四형제 보더라도 가히 항렬로써 이름을 지었었음은 옛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끝으로 봉식(氣植)씨가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을 것이다. 소위 변의(辨疑)와 질의(質疑)와 전의(傳疑)함이 대개 이와 같이 개진(開陳)하였으니 어찌 이 말들을 모두 차례대로 기록하여 위로는 선인들이 훈계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손의 고찰 있기를 기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여 말하기를『그러하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쓰노라.

歲丙子仲夏上澣 六十一세손(면천) 謹植 謹記

 

 

속변 61세손 영식
우리 인씨의 계통이 중국의 풍익(馮翊 : 땅이름, 즉 풍익대부 印瑞)에서 나와서 우리나라의 훌륭한 성(著姓)이 된지가 오래된다. 지금으로부터一백六十九년전 무자년에 족보를 처음 만든 이후로 문헌에 증거할 수가 없어서 세대(世代)가 누락케 되어 아찬공(휘瑞)이하로부터 다만 두어분의 현조(顯祖)만을 기록하였으되 능히 계대(系代)하지 못하였고 석성공(휘璫)이하로부터 파조(分派中祖)에 이르기까지만 비로소 계대(系代)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더러는 자세치 않다는 구절(句節)이 있어서 이를 선부형(先父兄)들께서 고심(苦心)하던 바요, 후손의 통한(痛恨)이 되었던 것인데 이 얼마나 다행한가? 요즘 훌륭한 일가 형제 봉식(鳳植), 근식(謹植) 두 분이 널리 여러 서적을 찾으매 우리 인성에 관한 것이 있으면 혹은 등본하고 구입해서 두루 고증하기를 마지않다가 강본(姜本)을 얻게 되었는데 아찬공(阿餐公 : 휘瑞)로부터 파조(派祖)에 이르기까지 계대(系代)가 밝게 나타나서 강본을 받들어 두루 보매 마음으로 감복되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자손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강씨(姜氏)네가 어찌 알았으며 선조께서 전하시지 못하신 바를 강씨네가 어떻게 전했느냐. 이에 있어 깊이 생각하고 맹성(猛省)하면서 족보와 함께 참고해 보니 강본에 실린 것이 족보에는 누락된 것이 있으나 족보에 실려 있는 것은 강본에는 누락이 없고, 정정(井井)히 소목(昭穆)이 문란하지 않고 조리있게 연기(年紀)가 차이나지 않았다.
또 대장군 공(휘公秀)의 휘자(諱字)옆 주(註)에는 특히 한 아들만 낳았다고(特書生一子)하였으니 가히 그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보는 듯 하매 이 하나의 귀절이 족히 여러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문이 없을 것이다. 이에 당황 황홀하여 깨닫고 내가 말하기를『이것은 고려때 우리집의 세계(世系)로서 만성보를 만드는 사람의 수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 집안은 난리중에 잃었으되 만성보는 오히려 세상에 전해졌고, 강씨네가 또 초본해 전해 왔으므로 우리 집안의 족보와 비교컨대 더욱 자세한 것이다. 진시황의 불도 능히 벽속의 책을 태우지 못하고 산사람의 입은 막지를 못한다 하니 이로써 보건대 지금의 글이 있으면 옛글도 없을리가 없는 것이요, 옛글이 없다면 지금의 글도 있을리 없는 것이니 강본은 옛 우리 집안의 옛글인 것이요, 족보는 우리 집안의 지금 글인 것이니 이제 선대를 기술(記述)코져 한다면 옛글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종중 의론이 모두 말하되 족보는 우리 집안에서 전해온 것이요. 선대 어른께서 여러 차례나 만들어서 손때가 아직도 새로운데 가히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하도다. 슬프다! 이런 구실은 선대 어른의 본뜻이 아닐 것이며 후세 사람의 고찰 있기를 기다려 아직 보류해 둔다고 하신 것은 어찌 오늘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이제 이와 같이 가히 고증할만한 것이 있음에도 고쳐 바로잡지 않으면 어찌 후세의 고증 있기를 기다릴 수 있으리요. 구습에 얽매여서 소절(小節: 적은마음)에 구애된다면 마침내 완 전한 족보를 할 날이 없을 것이니 슬프고 애석하도다. 아직은 따로 강본을 기록해 두어서 후손의 총명한 사람이 나서 능히 강본대로 확립할 때에 여러 사람들이 막지 않게 되어서 바르게 되기만을 기다리는 바이다. 불초 후손 영식(榮植)은 감히 거친 말로서 辨疑의 끝에 이어서 써서 이르노라.

歲丙子初夏下澣 六十一세손 榮植 謹書


姜本 - 今成一部之完書, 以待后考〔五回丙子譜 六十世 絃綺 序(덕산)〕
〃 - 往于姜栗溪鄕賢祠求世系以光前烈〔五回丙子譜 鉉(平山, 六十二世)序〕
〃 - 鳳植, 謹植氏, 三往北韓, 得姜本, 發先賢之所未發, 傳之無窮〔五回丙子譜 - 六十一世定奎(淳昌)序〕
派系不明論
失之兵火派系未詳 - 若其宗派支派之傍列, 何從而得其詳也〔五回丙子譜 - 六十世絃綺(덕산)序〕
世派未詳〔五回丙子譜, 六十一世謹植 序〕, 碩城府院君以下諱有行列은姜本也라
上系未詳〔五回丙子譜, 六十三世綏昌(송도파)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