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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우리 喬桐印氏 宗門의 族譜 發刊은 一回 戊子譜로부터 이번 七回甲子譜에 이르기 까지 距今 二百十 六年間 의 歷史를 지녀온 莫重한 巨事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自己의 血統인 同姓同本을 百代之親이란 倫理를 覺醒 遵守하여야 하는 人道的 正義에 立脚하여 明哲한 譜法으로 一源千派의 宗支와 壬子萬孫의 昭穆을 明確히 分別하게 되니 人類社會에 있어 族譜의 必要性을 더 말할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聖스러운 族譜를 崇高하신 先祖께서는 交通 및 諸般 어려움을 무릅쓰고 毅然히 發行하여 우리에게 傳承하여 주셨습니다. 이번 甲子譜發刊에 있어서는 完全한 大同譜 形式으로 編纂함과 同時에 一回譜로부터 六回譜 까지 完譜를 이루지 못한 点을 勘案 先系 補完함에 있어서 舊譜에 매양 論及하신 資料에 依하여 各文獻과 五回丙子譜 當時에 求得 附錄한 姜栗溪 家藏萬姓譜를 參照하여 年代 錯誤와 世代 漏落된 代數를 補完 成譜하였는바 이는 千思萬慮를 거듭한 나머지 編纂委員會의 提案으로 代議員 總會의 決議에 依하여 譜冊 卷首에 上系 補正 合意書를 添付 發刊하였습니다. 우리 國家社會는 加速的으로 發展하고 있음으로 賢明한 後孫들은 宗族之義를 恒時 잊지 말고 親和를 敦篤히 하고 相扶相助의 精神을 더욱 奮發해서 새 時代 새 歷史에 우리 宗族史를 가꿔 大發展이며 大榮光이 된 合致하여 成就하다면 이것은 眞實로 우리 喬樹(喬桐舊號) 印門에 大發展이며 大榮光이 된다는 뜻에서 懇曲히 付託하여 두는 바입니다. 끝으로 이번 譜事 推進에 있어서 모든 어려운 與件 속에서 國內全域 宗親諸賢께서 物心兩面으로 協助 指導하여 주신 德分으로 忠貞祠 齋室 建立事業까지도 잘 이루워지고 있으나 아직도 南北이 分斷되어 北韓에 居住하시는 宗親께서 同譜치 못하는 것이 恨이 되오나 多幸히도 南韓에 居住하는 諸派가 參與 成譜하게 됨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不肖 元來 淺見薄識하고 不德한 사람으로서 重大한 宗事를 責任지고 大過없이 進行된 것은 오로지 實務 任員諸位의 誠實한 勞苦의 成果임을 眞心으로 感謝하면서 이에 갈음합니다.

甲子一九八四年 月 日 喬桐印氏大宗會長 致明 謹識

 

 

편찬위원
편집위윈회고문 중배(송헌) 운식(참의) 윤식(참의) 현팔(송헌) 석보(승의)
편집위원장 치명(참의)
부 위 원 장 달환(참의)
편 집 위 원 남기(장령) 명식(참의) 예근(선교) 영환(참의) 치면(참의) 영철(교위)
교 정 위 원 대영(참의)
편 집 위 원 광열(송헌) 정원(승의) 선홍(통훈) 종식(송헌) 창홍(대원) 현옥(송헌) 도식(참의) 태준(참의) 광수(송헌) 현흥(송헌) 현길(송헌) 태식(참의) 영배(참의) 준식(참의) 태식(참의) 봉기(송헌) 태수(교위) 주성(선전) 대식(부사) 영초(장령) 석대(승의) 석근(승의) 재환(정랑) 종기(예공) 우진(통훈) 태철(송헌) 광식(송헌) 예근(선교) 두한(대원) 대영(참의)
수 단 위 원 대흥(사직) 종기통훈) 남기(장령) 영철(교우) 주완(선전) 태용(송헌) 창원(판관) 현일(송헌) 영식(송헌) 태철(송헌) 태기 기선 석대 순원 상갑 국환(송헌) 광수 사택 종식 달용 우진 석숭 성재 주성 명환 홍식 현길 영식 광열 근수 병갑 치남 치석 주환 영환 문환 용식 달영 예근 옥진 치용 찬식 용식 태식 일규 희창 찬세 재우 정진 치옥 을환 치흥 두환 남진 철영 영호 두환

 

 

上系補正合議書(상계보정합의서)
一. 第一回創刊戊子譜의 上系
第一回戊子譜는 李朝英祖四十四年(西紀一七六八年)에 伊山府陽村宗中(現德山派)에서 都有司諱弘信, 諱彦器, 諱尙德, 收單有司諱彦經, 諱命信(以上先祖는 德山派) 諱聖迪(淳昌派)氏等의 編輯에 依하여 創刊되였던 것이다.
이 創刊譜의 基礎資科는 이보다 數年 앞서 別世하신 德山派 諱有章(碩成府院君十二世孫)氏가 多年 積功하여 制定한 草稿를 근거로 하여一回譜때 여기에 各派의 下系草單을 모아 折衝編輯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印姓이 이미 新羅儒禮王十四年(西紀二九七年頃)때 東來하였으니 歷年이一千六百餘年後에 이르러 創譜케되매 上系가 失傳되여서 新羅時代의 六百餘年世系가 全昧케 되였고 高麗時代도 亦然하여 高麗의 十七位中에서 겨우 八位(直祖)만 알았었고 또한 修譜五派(淳昌, 德山, 沔川, 保寧, 溫陽天安派)가 겨우 自派의 派祖以上은 分明히 알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故로一回譜의 文獻狀況과 編輯經諱를 考察컨대,
一回譜序
槪言前世, 便同先天, 欲語心寒, 譜牒未完, 刊本不存, 抑何故也, 遍證史牒, 補其疎漏(諱尙德序)
諱有章, 彦信氏, 積稔彈精, 蒐采群籍叅瓦纂輯, 於是乃克有緖(諱命信序)諱有章氏, 與諸宗人, 講求遺失, 曲明系派(諱弘信序)
이렇게 두루 史籍을 찾아서 上系의 疎漏된 곳을 補塡케 되었는데 그나마 各派의 草單도 派祖以上의 上系에 있어서는一準치가 못하였던 것이다.(一回譜凡例에 보면 各處 譜單이 詳略不一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즉 東來始祖의 上系부터가 或은 印瑞 印應飛 印觀 또는 印應飛 印瑞 印觀으로 하여 이와 같이一準치 못하매 이를 國史나 家譜에서 어느것이 옳은지 考證할 수가 없어서 諱觀께서 漏譜케 되었고 東來始祖公(諱瑞)의 諱字만도 諱端으로 傳來되어 왔는데一回譜때 喬桐家乘과 德山派外孫趙冶谷의 家傳文獻에 모두가 諱瑞로 記錄되었으므로 諱瑞로 校正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始祖의 東來年代도 新羅基臨王五年으로 傳해 왔었는데 東國通鑑을 보니 「基臨元年印觀賜爵」이라고 하였으니 代數가 바뀐 것 같다고一回譜에 記錄되어 있다.(以上諸問題가 姜本에서 辨證됨)
여기에서 新羅朝의 間漏世代에 對한 先人論考를 살펴 보기로 한다.
印姓, 同祖於阿餐瑞, 其後孫裔, 世公世卿, 間經兵火, 文數殘缺, 年代不可考(中畧)間漏世代八百餘年, 其爲世, 將不下三十有奇(一回譜判書尹鳳九序, 后孫彦器序亦然)
비고 : 三回譜때 德山派諱榮國序文에는 數百年 云하였고, 四回譜때 金允植序에서는 五~六百年으로, 四回譜때 溫陽派의 監役公諱勉學序에서는 八百年~三十代로, 翰林學士公(諱邠)墓碣銘에서 鄭宜默先生은 八百年間으로 기록하였었음.
그리고 다음으로 高麗時代의 繼代는 어느것을 根據하여 制定케 되였는지를 살펴보면一世祖는 高麗 仁宗朝의 后孫諱毅(侍御史)公으로 起하여 高麗를 系代하였으나 이 또한 世傳家譜가 없었으므로 史乘에 依하여 著名先祖를 時代順으로 해서 算定케 되었던 것이다.
즉 一回譜의 屛溪尹鳳九判書序文에 依하면 「至侍御史公(諱毅)始見書籍御史以下, 雖有譜, 只存大都」라고 하였고, 또一回譜 凡例에 보면 「舊草譜와 東國通鑑을 叅考함에 世代와 支派를 가늠케 되였다」고 하였다.
一回譜의 諱弘信, 諱命信序文에 依하면 「三國以來, 屢經喪亂譜牒靡傳, 至于麗代, 聞人碩輔, 接武輩興然後, 派系之遠近, 始可考也」라고 하였으며 또一回譜의 諱彦器序에 依하면 「諱瑞以後, 因亂失系, 至八百餘年而, 在麗朝, 遠代孫諱毅, 諱亮, 諱大紳, 諱公秀, 連四世事仁明高元四朝, 位皆至華顯, 又在左政丞諱候, 右政丞諱承旦, 益大以顯, 又歷翰林學士諱邠府院君諱璫, 吏部侍郞諱海, 至判宗薄寺事諱成伯后, 始入我朝(以上은一回譜의 上系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史乘에 依한 系代이었으니 史乘이 우리의 世系를 옮겨 놓은 것이 아닐진대 제대로 系代가 맞을理가 없었던 것이다.
一回譜의 尹鳳九序에 依하면「今於可講之世綱, 會而統之~斯可矣未知也(此項六字는一回譜의 諱彦經序도 亦如此表現)」라고 하였으며 더욱이 諱承旦公以下五世에 對하여는一回譜때부터도 「五世一朝, 事涉可疑」라고 하였는바 이 八字의 但書는 오늘날까지一部分은 繫留되여 別錄의 諱承旦公 事績下에 明記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二, 二回譜의 上系別錄
上系에 있어서 文貞公(諱邠)의 事蹟이 國史에 漏記되매 誤代를 不免케 되였고 碩城府院君以上에 傍系의 諱候, 諱承旦公 二代를 直系로 誤認하여 系代속에 더 넣었으며 諱承旦, 諱璫께서 同時代분으로서 從兄弟間인것을 祖孫間으로 하였고, 傍系의 諱成伯公까지 여기에 더 넣었던 것이 五十年만에 二回譜를 重修케되매 여러 史乘(高麗史)을 찾아오매 疑問과 錯誤가 發見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즉 彙纂麗史列傳을 살펴보니 諱承旦(延安府院君)公의 아들로 庶子 諱完이 나와있고 學士公(諱邠)의 諱字가 없을뿐 아니라 이것이 漏記라 해도 行列이 相合치 않고 보니 自然一回譜上系가 疑問視되어 不得已 諱毅, 諱亮, 譯大紳, 諱公秀, 諱候, 諱承旦公의 以上 上系六世를 「源派叅考記」라 하여 別錄으로 내모시고 다음代의 學士公(諱邠)으로써一世로 改錄케 된 것이다.
이에 대한 論考를 二回譜 凡例에서는 다음과 같이 論考하였다. 즉 「自毅, 亮, 大紳, 公秀, 至此四世, 繼緖昭著나 諱候, 諱承旦二代, 昭穆未詳, 年紀相錯, 未敢依舊繼統姑爲列書, 以俟後考」라고 하였던 것이다.(以上 諸問題가 姜本에서 辨證됨)

三, 四回譜의 辨疑制定
四回譜에 이르러서는 學士公(諱邠)과 碩城府院君(諱璫)과의 父子系代가 疑問되였으나 明証을 發見치 못하여 이를 다만 辨疑에만 記錄하고 그대로 重刊하였으나 이때에 비로소 歷代傳來의 모든 疑問点을 集大成하여 世系辨疑를 制定하였는바 이것이 六回譜때까지 世譜卷首에 실려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印門의一大懸案의 宿題인 것이다. 四回譜의 要旨는,
學士公(諱邠)의 年代는 破閑集의 語意가 作者李仁老가(仁宗다음의 毅宗五年生) 先人의 事蹟을 論한듯하고 또 翰林學舍의 官名이 忠惠王때는 翰林直學士였으니 그러면 學士公께서 忠惠王때가 아닌 것으로서 오히려 윗代로 더 올라가서 諱毅(仁宗十六年에 侍御史)公과 或先或后의 相矩가 되겠고 또 麗史에 보건대 諱承旦(延安公)公의 아들에 다만 庶子 「完」이 있고 學士公의 諱字가 없으며,
諱承旦(延安公)公과 諱璫에서는 同時日에 將相을 지내셨으며 그 이름자와 行列이 맞지 않으 며,
學士公과 諱璫께서는 二百年의 相矩가 되며,
諱海(吏部侍郞)公과 諱元寶(判密直公)公에서는 그 事蹟이 五~六年 相矩의 同時代인바 어찌하여 孫子인 諱元寶께서 祖父와 한 시대에 태어나 官職이 祖父보다 더 높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는바 이것은 諱璫, 諱海 아래에 傍系인 諱成伯公이 들어가 있어서一代 차이가 더 나게 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別錄으로 모신 上系六世는 諱邠, 諱璫派와는 서로 맞지 않는 他派로 보아 관계치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以上諸辨疑가 先人推測과 같이 姜本에서 辨証됨)

四, 五回譜의 世系變勤
五回丙子譜에 이르러서는 沔川派 諱謹植氏께서 널리 先史蒐集에 苦心勞力하던中 天佑神助로서 咸南에 가서 栗溪姜必東家藏의 萬姓世系(世稱栗溪譜 : 印門略稱姜本)를 求得케 되었는바 이것은 栗溪가 譜學에 關心이 깊어서 諸姓世系를 筆寫蒐集하여 世傳하여 온 것으로서 栗溪는 李朝中葉初(中宗年間추정)때 분이었던 것이다.(이 책의 本名은 諸姓譜帖임)
이 姜本는 唯一하게 栗溪后孫 집에서만 世傳해은 稀貴本으로서 그 當時 우리 印門의 家譜에서 轉載된 것임이 明証되는 眞本으로서 그후 우리 印門에서는 失傳된 家譜인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임진왜란 발발 七十六年전 제작되었으니 임진왜란때 소실된 우리의 옛 世系가 분명한 것이다.
姜本으로 해서 新羅儒理王以后로부터 高麗仁宗때까지의 失傳三十代를 찾게 되었고 高麗朝에 있어서도 諱毅公에서부터 碩城府院君 以前의 系代錯誤와 失傳世系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年代와 事蹟 行列等이 整然相符하며 더욱이一回譜以來 諸辨疑가 糾明케 되어 曆代로一大宿題인 完譜를 可期케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碩城府院君 以下七世에 있어서의 派順이 變動케 되매一百六十餘年間(五回譜當時)의 慣行에 따른 我執과 小節에 拘礙되어 宗議가 不一하매 不得已 姜本대로 完譜치 못하고 姜本世系를 다만 附錄에 登載하여 오늘날까지 繫留中에 있는 것이다. 이때에 비록 姜本대로 修譜치는 못하였으나 이 姜本으로 해서 學士公께서 得貫中祖요, 仁宗朝(이때 發見한 櫟翁稗說에도 睿宗-仁宗年間으로 明記)임이 明証케 되어 別錄에서나마 學士公을 仁宗時 先祖로 再配列하였고 碩城府院君以下의 下系에서는 但松都兎山派만이 姜本대로 認定(系代와 諱字, 職啣의 誤謬을 姜本대로 修正 : 四․五回譜參照)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姜本대로의 修譜를 宗議에서 不認케되니 自然 系代가 分明한 碩城府院君에서부터 更起一世케 된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생각케 되는 것은 五回丙子譜때 歷代舊譜와 姜本을 參考로 修正해야 했을 것이며 宗議不合으로 姜本대로 全体를 修正치 못하더라도 異議가 없었을 碩城府院君以上의 四十世만은 그대로 繼代補正하였더라면 下系七世는 次回修譜時에 自動的으로 追認케 됨이 事理일진대 이 点이 遺憾之事라 하겠다.
이미 말한대로 以上의 先代諸辨疑가 姜本에서 거의 完全辨証케 되는바 이것은 辨疑와 姜本을 參照해 보면 알 수 있음으로 여기에서는 일일히 說明을 省略하고 但五回譜當時의 先人들께서 姜本을 考察한 것만을 要略摘示하여 叅考에 供코저 한다.
漏落世代具全, 可期誤錯補正(沔川派謹植序) 諱安以下行列昭穆相承(諱謹識續辨)求姜本以光前烈(平山派諱鉉序文) 姜本一部完書(德山派諱絃綺, 諱鍾黃序文中) 系代分明, 與吾譜尤詳(中略)行列年代明徵(中略)春秋筆法, 質諸鬼神而無疑今文, 姜本古文, 今欲完古, 捨古文何以哉(諱榮植續辨中拔萃)
東來始祖公父子事蹟年代, 與舊譜, 尤爲妥當, 學士公得貫明徵, 年代不差足可以漏記先代補正諱字行列, 井井有條, 吾譜壬亂以后創譜, 栗溪鄕賢祠奉安(以上德山派諱榮台續辨五可論拔萃)

五, 今譜(第七回譜)編纂委員會所見
여기에서는 先人未言及部分에 對한 새로 發見分 合致点만을 摘示論及코져 한다. 姜本의 上系四十七世에 있어서 그 年代가 正確昭詳한 것은 어느 姓氏의 上系를 보아도 이같이 완벽한 것이 드물다 하겠는바 이것은 우리의 先代가 新羅 高麗朝의 赫赫한 家門이였기 때문에 此本이 尙存케 되였음을 立証하는 것이다. 但生卒年月日만 없을뿐 繼世하여 벼슬한 年代가 數代間隔으로 王朝와 年代表示(例甲子年)까지 나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姜本을 槪論컨대 첫 問題는 東來始祖(諱瑞)公以下 十三世가 獨子로만 내려온 것인데 이것은 他姓이 抄해간 것이니 그 本流만 적었거나 또는 遠代의 事蹟이니 逸失疎漏케 된 것이라 하겠으니 始祖以下 十三世의 일은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이다. 이는 大姓들도 始祖의 遠代에 있어서는 神話的構成이 많음을 想起한다면 首肯케 될 것이다. 이는 卵生說話의 密陽朴氏와 金櫃說話의 慶州金氏가 있으며 國史도 擅君說話나 그 후의 時期에는 箕子朝鮮이 있느니 없느니하여 論難이 많지 않은가?
十三世以下에 있어서는 間間히 入世獨子, 五世獨子, 四世獨子(高麗高宗以前까지)로 세 곳이 되여 있으나 이것은 實際性이 있는 일이니 疑問의 餘地가 없는 것이다. 全体年代에 있어서도 新羅時代는 東來始祖(諱瑞)公께서 儒禮王十四年(西紀二九七年)이신바 그때로부터 高麗建國初(西紀九一八年)까지 六二一年間에 二十八世가 되였으니 이것은一世마다의 間差가 二十二年 相距가 되는 것이니 맞는 年代인 것이다. 그리고 高麗朝도 歷年이 四六九年間(一三九二年高麗亡)에 十五世(諱原寶까지)가 되였으니 이것은一世마다 大略 三十一年 相距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上系先祖님을 姜本에 나타난 王朝年代(例 ○○王甲子年)를 西紀로 換算하여 先祖順位別로 圖表明示코저 한다.(姜本에 나타난 年代表示가 된 先祖만 論據함)

               
世守/ 區分 윗분의 年代와 아랫 분의 年代를 西紀로 換算 總計年數 一世마다의 相距年數 備考
諱瑞公 ~ 諱厚公四世 279 ~ 370 73 년 18년  
諱 厚 ~ 諱高輝四世 370 ~ 477 107년 27년  
諱高輝 ~ 諱 實七世 477 ~ 604 127년 18년  
諱 實 ~ 諱淳郁二世 604 ~ 646 42년 21년  
諱淳郁 ~ 諱只宇二世 646 ~ 668 22년 22년  
諱只宇 ~ 諱 吉八世 668 ~ 766 98년 12년 登科連四世
諱 吉 ~ 諱義釰四世 766 ~ 814 48년 12년 登科連四世
諱義釰 ~ 諱 純 三世 814 ~ 918 104년 35년 諱公秀~諱做父子三十八年差參朝
諱 純 ~ 諱 毅 四世 918 ~ 1138 220년 55년 늦게 벼슬됨(生卒日이 아닌 故로)
例 : 諱做諱璫父子가 四十九年差가 됨
諱 毅 ~ 諱 邠 四世 1138 ~ 1146 8년 同時代 十五世生男 빨리 登科 連四世
例 : 曾祖칠五才 曾孫三十세임
諱 邠 ~ 諱 珪 三世 1146 ~ 1192 46년 15년 三世 거의 同時代
例 : 諱元寶諱仁敬父子十四年差
諱 珪 ~ 諱大紳四世 1192 ~ 1258 66년 16년  
諱大紳 ~ 諱公秀二世 1258 ~ 1269 11년 11년  
諱公秀 ~ 諱 做 二世 1269 ~ 1307 38년 38년 늦게 벼슬한 것이 됨 (生卒日이 아님에 留意)
諱 做 ~ 諱璫父子二世 1307 ~ 1356 36년 36년  
諱 璫 ~ 諱安父子二世 1356 ~ 1362 1357년父子同時赴元 늦게 벼슬
諱 安 ~ 諱 海 兄弟世 1362(귀양) ~ 1383 21년 21년  
諱海 ~ 諱原寶父子二世 1383 ~ 1387(귀양) 4년 4년  
諱原寶 ~ 諱仁敬二世 1389 ~ 1401 12년 12년  
諱 瑾 ~ 諱鐵崇二世 1401 ~ 1467 75년 37년  
諱鐵寬 ~ 諱三權二世 1467 ~ 1492 20년 10년  
諱三權 ~ 諱守孫同行列 1514卒 ~ 1524卒 10년    

이 圖表內에서 보는바와 같이 高麗高宗때 諱大紳公以下부터는 麗末의 諱元寶公까지 八~九位나 麗史에 나타난 先祖이시므로 世譜에서도 異論이 없는 것이니 諱大紳公以后의 年代差를 于先參考하여 그 以前의 高麗, 新羅年代와 相互比較해 보면 그 年代가 納得케 되는바 諱大紳公以後보다 그 벼슬한 年代가 若干 部數로 빠름을 認知할 수가 있으니 이것은 生男도 빠르고 登仕도 빠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年代는 生卒年月이 아닌 登仕表示이므로一例를 들어 父子間의 二世라도 父의 顯職就任이 子보다 늦거나 또는 同時가 될 수도 있고 또 十二年, 二十年, 二十七年 相距가 될 수도 있는 것이요, 祖孫三世나 曾祖曾孫四世도 同時相矩하여(諱毅, 諱邠께서는 曾祖曾孫間에 八年餘相矩됨) 登仕할 수도 있고 또 近三十年相距(例 : 諱做, 諱璫父子 二世가 四十九年相距가 됨)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例示圖에서 보는바와 같이 大体的으로 新羅朝에서 高麗高宗(諱大紳公時期)때까지가 大体로 三世年代가 十五年~三十五年 相距요 四世가 十二年~十六年 三十五年 相矩가 되고 七世도 十二年~十八年 相矩, 八世도 十二年으로부터 二十七年 相矩(以上 相距年數는 每世代當相矩年數임)가 되는바 이것은 顯職就任의 早晩과 生男 天壽의 早晩에 매인 것이다.
이 圖表에서 가장 問題되는 곳이 四世가 二二○年間으로서一世當相矩가 五十五年 되는 곳과 諱毅, 諱邠公과의 四世가 八年相去인바 이는 圖表備考欄을 보면 納得될 것이다. 新羅와 高麗朝의 四十三世年代와 事蹟, 職啣, 行列, 料擧制度創設時期初 定諱字等이 大部分 三國史記와 高麗史의 年代 時代別 官名에 符合하고 事蹟은 正史와 同一하며 前後에 條理가 整然한데 唯獨 碩城府院君 以下의 七世만이 不合不信될 수 있겠는가? 하는 点에 있는 것이다. 碩城府院君以下 七世는 本姜本收藏當時에서 가장 相近한 年代요, 또 下代寸數가 大槪 十二寸~十八寸以內에 不過하니 上系에는 或 誤傳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近寸 近代의 것이 不合할리가 없고, 碩城府院君때에 이르러 이 때는 行列準行이 定型化된 初期였고, 이때 이미 四十一世에 達하였으니 이는 增補文獻備考의 二十一本 根據가 되는 事由가 된 것이라고 推測케 된다.
더욱이 下系가 分派祖에까지 이르렀는바 그때의 年代가 壬辰倭亂勃發七十九年前(諱三權公卒日)에 該當(一回譜戊子年은 壬亂後一七七年째임)되니 이는 壬亂때 失傳한 上系가 分明한 것이다.(壬亂當時印門戶數가 稀姓이였을 것은一回譜當時 沔川, 德山戶數가 各各三十戶未滿임을 勘案할 때 推測할 수가 있게 됨)
二回譜때 咸昌諱수璲氏의 譜序에 보면 七代祖監役公이 家議重刊云이나 지금은 但古紙一卷而失傳云하였으니 이는 二回譜當時에서 二百餘年前에 有家譜가 證明되는바 姜本이 그 當時의 印門家譜에서 轉載된 것이 分明케 된다. 碩城府院君以下가 七世나 되니 그 當時만 해도 二百十年間이나 準行되었던 것인데 壬亂以後 世系를 失傳하여一回譜때까지一百七拾餘年間 失傳하였던 것이다.
그 뒤一回譜를 英祖때 創刊하여 至于今 二百餘年間 誤信해 왔었는데 正本世系를 되찾은 오늘날 派順變勤의 小節에 얽매여 앞으로의 千萬年 後代까지 誤傳해서야 이는 修譜의 目的에 背馳되지 않겠는가?
또 上系先祖를 世系와 別途로 別錄해 놓고一世祖以下의 世系만도 現行과 姜本을 두 곳에 다 記錄해 놓고 辨疑도 언제까지나 卷頭에 실어 世傳해서 后絲으로 하여금 混亂과 疑訝 先祖不信感을 誘發토록 이대로 放置해야 할것인가? 書冊이란 앞뒤가 맞고 條理가 整然해야 信憑이 되는 것이며 修譜의 目的은 上承先祖하고 下繼后裔하며 尋其脉絡하여 不失條理之謂也인데 國漢文混用의 오늘날에 이르러 舊譜序와 辨疑, 續辨等이 모두 飜譯되어 后孫이면 누구나 眞僞를 分揀케 되였는데一時彌縫한다 해서 大義가 暗藏될 수 있으랴.
以上의 諸觀点下에서 熟考한바 高麗史와 姜本을 參考校正함이 옳다고 判斷케 되어一回譜以來의 歷代世系를 綜合해 보면 明若觀火케 된다.一回譜는 各譜五派以外는 諸派가 諱字마저 未記(全体世系分派圖는 五回譜때 始成됨)되였는데 二回譜때 高山, 咸昌, 草川派가 叅譜하였고 三回譜때 坡州派가 四回報때 龍岡, 松都, 喬桐, 全州, 平山派가 五回譜 때 兎山派가 叅譜하였는데 以上 諸派가 或系統만 다르게 되였지 거의 下系만은 姜本대로 제자리로 찾아들었으니 이것은 무엇을 입증하는가. 洪州派의 先祖諱瑚께서는 溫陽派先祖 諱琥와 同人인데 世譜에는 同名同人이 二人으로 二派에 分載되였음이 立證되였고 그러면 現行舊譜의 宗支順은 誤傳으로 因한 易序誤系로一回譜때 策定된 것이라 하겠다. 즉 諱榮寶公以下 三代와 諱堅以下 三代가 失傳되니 但數字에만 맞추었고 더욱이 諱堅吉公을 諱堅으로 誤信케 되매 宗統에 淳昌派가 들어가게 되었고 咸昌派는 元來次派였으므로 亦是 次派로 登載케 되였을 것이다. 이것은 諱仁敬公의 孫錄에서도 證明되는바 즉 姜本과 같이 四子中에서 三子有后一子出系를 舊譜에서는 三子有后一子有后一子無后로 숫자만 겨우 맞추고 보니 다음 代에 또 玉邊으로 諱字가 되어 琮, 琛, 球 三兄弟분을 溫陽派 派祖代로 誤代케 된 것이다. 淳昌, 咸昌派가一回譜때 宗統으로 이미 策定되였으니 三回譜 때 비록 坡州派가 제대로 上系를 써 왔더라도 不認케 되였을 것이다. 그러니 誤系로서 옆으로 자꾸 밀리게 된 것이다.
溫陽派는 諱仁敬, 諱琥, 諱鐵壽公의 三代를 모시고 墓下에서 世居하고 있으나 上系를 失傳하여 出系나 系統을 잘 모르고 보니 自然墓順序대로 譯仁敬公의 嗣孫으로 認定케 된 것이며 天安派도 溫陽派와 隣里相居이나 서로 上系分派를 失傳하여 몰랐는데 이것은 派祖 바로 아랫代의 諱字가 忠傑, 忠彦이며 諱忠彦公께서는 寧城邑德에도 天安原居姓氏로 記錄되어 있는 것이다.
先人辨疑에서 誤代로 보신 諱成伯公은 麗史年代와 行到에 依據하여 보매 誤代가 自明해졌고 碩城府院君의 高祖께서 諱貞으로 碩城君이라 함은 이분의 封君으로해서 玄孫諱璫의 碩城府院君 封號를 定하게 된 淵源이라 하겠다.
즉 封君을 先代의 舊邑號에 따라 내려주는 것이 옛 朝廷의 儀典制度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石城府院君의 事蹟에 元의 援軍으로 出征한 것이나 婆娑府攻破한 것이 未記된 것은 當時明國과의 關係로 볼 때 首肯이 되며 諱安의 彈劾事蹟이 없음은 印門家譜였던 것임이 立証되며 諱元寶公의 事蹟은 麗史나 功臣錄券에 依據하여 明証되는바요 또 玄孫, 三權, 三碩, 守孫께서 伸寃코져 上疏한 것이나 李太祖癸酉에 遣禮官 致祭라 함은 實로 家譜에 틀림없는 것이다.
上系에 있어서도 東來後 新羅朝에 벼슬하다가 百濟로 가셨었고 그 뒤 還入故國(신라)한 것이나 또 眞平王때 隋나라로 使臣을 가셨었고 善德女王때 唐나라로 使臣을 가신 것이 매우 合理的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小節과 偏見을 버리기 爲해 派系에 對한 先代遺訓을 再吟味키로 한다. 즉 四回譜辨疑에 보면『舊譜의 記事는 壬亂後에 傳聞한 것을 쓴 것이므로 國史와 不合함이 많으니 이제 辨正하려면 國史에 따름이 옳다 하겠고, 派系와 昭穆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辨正할 資料가 없으므로 다만 疑心된다는 点만 傳하노라』라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添言할 것은 우리의 世譜가 大同諸法에 의하지 못하고 片譜요, 各派名도 職啣名으로 制定치 못한 것은一回譜때 世系 失傳으로 未完品을 겨우 創刊케 되니 後日에 証據가 나올까 期待한 나머지 便法을 썼던 것인데 回를 거듭할 수록 誤差만 생기고 보니 完譜가 되지 못하고 그대로 踏襲케 된 것이다. 派順不信에 對한 先代見解는 歷代에 걸쳐서 今日에 至하였음은 다음 여러 글에서도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二回譜諱斗七序에서는 「譜牒未全, 本支莫辨」이라 하였으며 五回譜때 諱絃綺序에서는 「高麗朝全威然 因亂失傳, 派系未詳, 宗派之相繼支派之傍列, 何從以得其詳耶」라고 하였다. 하나의 明証만 있어도 國史까지 修正케 되는데 以上과 같이 姜本은 前後事蹟이 明徵되므로 今回甲子譜부터는一回譜精神下에 諸般史料와 文獻 姜本을 參考하여 上系를 補正키로 한다.
所謂 姜本은 本流以外의 支流派는 省略됨이 많다고 推測된다. 現實로도 十八派가 모두 나와 있지 않으므로 이런 곳은 舊譜에 依하기로 한다. 高麗史를 보더라도 熙宗때 印得候文科及第라 하였고 忠定王때 印暉은 贊勤誠理功臣 陽原君, 麗末에 印潤은 中樞院事였으며 옛 萬姓譜를 보면 여러분의 諱字가 있으나 失傳된 것이라 하겠으며 增補文獻備考에 나와 있는 印氏二十一本도 大部分 各派地名에 該當하나 無后된 地名이 많고 또한 어느 派가 該當되었는지 明徵할 수가 없는 것이다. 李朝初期에 四十七世에 이르매 二十一本까지 分派되였고 그 후 孫勢不振으로一回譜때 合譜(此項은 五回譜때 謹植氏도 亦如此論之)케 된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비록 적은 氏族이요, 李朝以後 비록 沈滯하였으나 이처럼 그 淵源이 깊고 新羅, 高麗에서 名門著姓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이미 家譜가 있어서 李朝中葉切까지 傳해을 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姜本이 이를 雄辨으로 証明하는 것이다. 먼 옛날부터의 先祖들을 모두 알게 된 오늘날 옛분들을 系代속에 바로 모셔서 위로는 거룩한 얼과 전통을 保存하고 后孫에게는 훌륭한 龜鑑을 삼고져 한다. 歷史는 后世에서 쓰는 것으로서 三國史記는 高麗에서 高麗史는 李朝에서 編纂한 것이다. 지금부터 千七百年前부터 내려온 諸般史料에 依據 完全하게 우리 系譜를 修正補完하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 第七回甲子譜重修에 이르러 先代 上系를 補正할 것을 本會議에서 合議하여 編纂補完하여 后孫에게 그 經過를 알리고 或 疑問이 있게 됨을 辦証키 爲하여 上系補正合議書를 卷首에 登裁한다.

西紀一九八四年甲子十二月 日 喬桐印氏世譜編纂委員會委員長 致明 外 任員一同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