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보(1891) | 교동인씨 역사 > 역대 족보 수보사 > 신묘보(18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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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인씨가 성씨를 얻은 것은 춘추때 인단(印段)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인씨가 있게 된 것은 신라의 아찬공(휘 瑞)으로부터 비롯되었고, 명성과 업적(名德勳業)이 세상에 이어서 빛난 것은 고려의 어사공(御史公 : 휘 毅)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소목(行列)의 서로 이음과 문장으로 가히 고증함은 학사공(휘 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슬프도다. 그 세대가 먼 것이어! 지금의 인씨는 모두 학사공의 후손인 것이다. 5 ~ 6백년의 사이에 여러 번 난리를 만나 보첩이 보존됨이 없으나 자손으로 각처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모두 능히 자기의 파계(派系)를 닦아서 그 근본을 잃지 않다가 영조 무자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간하여 합보(合譜)하였고, 그 뒤 병술년과 갑자년에 다시 한 것은 두세 번째로서 책과 질수가 점점 많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맨 나중의 것이 28년이나 되매 종손과 지손이 날로 더욱 번성하여 오래되면 장차 분간할 수 없어서 면천에 사는 인영철(印永哲)씨와 세경(世卿)씨가 중간(重刊)을 주창 발의하였다. 경기, 호남, 호서, 영남, 해서(海西 : 평산, 송도지방), 관서(關西 : 평양, 가평, 의주 等地)지방에 발문(發文)하매 모든 일가가 응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으매 수단(收單)하고 돈을 모아 인쇄하여 능히 이 책과 같이 이루게 되었다. 내가 남의 집들이 족보하는 것을 보건대 혹은 백년에 한 번도 하고, 혹 오~육십년에 한 번도 하게 되는데, 인씨와 같이 족보를 자주하고 또 쉽게 함을 보지 못하였다. 자주하면 반드시 상세하게 되고, 쉽게 하면 태만해지지 않나니 이것은 가히 세상에 모범이 될 것이다.
슬프도다! 사람마다 뉘가 조상을 숭모하고 일가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랴마는 항상 세상 사람들이 멀어지고 흩어져서 합심이 잘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손이 마음들이 흩어지면 조상의 훌륭하셨던 정신마저 또한 빛나지 못하는 것이니 족보를 함은 흩어진 마음을 합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인씨의 족보하는 일이 온 일가가 한 마음으로서 성의가 높으니 가히 조상의 정신이 모인 바를 알겠도다.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면 반드시 상서로운 경사가 생겨서 그 후손이 창성하리라. 인씨는 고려(勝朝)이전에 있어서는 진실로 명족(名族)이었다. 그 후로는 중간에 미약해져 떨치지 못하였으나 하늘이 수백 년의 침체한 뿌리를 북돋우어서 앞으로는 크게 그 가지와 잎새를 피게 할 것이다. 신묘 1891년(고종 28년) 중춘청풍(仲春淸風) 김윤식 序
편찬위원
喬桐印氏世系辨疑(교동인씨세계변의)
삼가 상고해 보건대 侍御史公(諱毅)以上은 世系를 진실로 알아 볼 수가 없고 侍御史公(諱毅)以下인즉 昭穆(序列)이 相承하여(즉一回譜의 諱毅, 諱亮, 諱大紳, 諱公秀, 諱候, 韓承旦, 諱邠, 諱璫의 系代를 뜻함) 可히 疑心할것이 없을듯 하나 그러나 譜牒에 실린바가 麗史와 不合함이 많으므로 이제 下記와 같이 辨論하여 後生들이 다시 考察해 주기를 기다리노라. 즉 舊譜에 侍御史(諱毅)公은 仁宗때 벼슬을 지내시고 學士公(諱邠)은 忠惠王때 벼슬을 하시었다 했고 侍御史公(諱毅)의 七代下에(즉 六代孫을 邠으로) 學士公(諱邠)으로 系代를 하였고, 또 舊譜에 李仁老破閑集中에 記載된 學士公의 詩를 引用하였으나 其語意를 살펴 보면 李仁老가 그 先輩의 事蹟을 論한듯 하니 可히 學士公에서 睿宗 仁宗사이의 사람임을 알겠고, 忠惠王때 사람이 아님이 分明하다. 그러면 侍御史公(諱毅)과 한때 사람으로서 或 先後의 差는 있으려니와 어찌 七代나 相矩가 되리요. 또한 더구나 翰林學士는 本是 忠惠王때 官名이 아니니 疑心됨이 하나요, 麗史列傳에 延安公(諱承旦)의 後系를 댄 것이 참으로 의문된다. 고려사와 고려사 열전을 보면 諱承旦의 아래에 學士公의 諱字가 없고 다만 庶子로 完이 있다 했고 學士公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은데 지금 學士公으로써 延安公(諱承旦)의 後系를 대었으니 이것 이 의심되는 것이다. 舊譜에서도 이미 말하였거니와 또 碩城公(諱璫)으로써 學士公의 後系를 대었으니(二, 三, 四回譜의 系代를 말함) 이는 더욱 妥當치 못한 일이다. 學士公과 頌城公(諱璫)의 相矩는 二百餘年이나 되는데 어찌 父子間이 되겠으며 延安公(諱承旦)과 碩城公(諱璫)은 同時에 將相이 되었고 이름과 行列이 次序에 맞지 아니하니 또한 어찌 祖孫間이 되랴. 그 疑心됨이 둘이요. 舊譜에 碩城公(諱璫)의 長子가 延城公(諱安)이 되었으니 이것 또한 妥當치 않다. 살펴 보건대 恭愍王三年에 元나라에서 우리나라에 徵兵을 請하여 高郵賊을 칠때 碩城公(諱璫)과 延城公(諱安)이 同時에 將帥가 되어 元나라에 들어갔다 했으니 父子間에 異國땅 머나먼 戰場에 同時叅戰 하였다는 것이 아마도 이러할 理致가 없을 것이니 疑心됨이 세가지요,(譯者註 : 이것은 世系가 자꾸 틀림을 發見케 되니 杞憂로서 疑心케 된것으로 思科됨) 舊譜에 侍郞公(諱海)의 長孫이 判密直公(諱元寶)이 되셨다 했고 麗史에는 辛禑王九年에 侍郞公(諱海)께서 知密直으로서 倭賊을 쳤고, 다음 十四年에 判密直公(諱元寶)께서 咸昌에 귀양을 가셨다 했다. 그렇다면 判密直은 階級이 知密直보다 높은데 어찌하여 祖孫이 한때에 隆威할수 있으며 官職이 祖父보다 孫子가 높을 수가 있겠느냐 이것이 疑心됨이 네가지요, 舊譜에 判密直公(諱元寶)이 罪로써 咸昌으로 귀양을 가셨다가 돌아오신 後에 翊戴功臣으로써 刑曹判書를 除授하여 咸山君을 封하였다 했고 開城宗人派譜에 當時의 位祿官職이 仔細히 記載되었으니 可히 믿음직하나 다시 麗史를 보면 辛禑王十四年에 判密直公(諱元寶)이 崔瑩의 黨에 連坐되어 咸昌으로 귀양 가시었다가 그곳에서 被禍하였으니 어찌 다시 翊戴功臣의 勳封을 받았으리요, 疑心됨이 다섯가지이다. 以上의 五個疑問條項은 모두 麗史를 參考하여 舊譜의 틀린 点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舊藉의 記事는 兵亂後에 傳聞한 것을 引用하였으므로 歷史와 符合되지 아니하니 이제 바로 잡자면 當然히 史記로써 옳다 할것이다. 겨우 그 錯誤된 점만 指摘하였고 派系의 昭穆(序次)에 이르러서는 더 以上 詳正할 수가 없으므로 아직 舊譜대로 依據하여 삼가하는 마음을 두고 疑心 傳하는 뜻을 쓰노라. 또 살펴 보면 侍御史公(諱毅)으로부터 延安公(諱承旦)까지의 六世는 年代가 不紊하여 事實이 相接하니 진실로一派가 되려니와 學士公으로부터 碩城公(諱璫) 以下의 年代와 事實은 延安公派(諱承旦)와 크게 맞지 아니하니 應當一派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强合치 아니하노라.
〔譯者註〕二派로 보아서一派先代는 爲氏實錄에다가 六世를 別錄한다는 뜻임. 서기一八九一年辛卯竹洞譜에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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